1897년 12월 상순 배재학당(培材學堂)의 학생회인 협성회 제29회 공개토론회에서 회보 발간을 결정하고 이듬해 1월 1일 구내에서 창간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발행허가는 1월 26일부터였다.
창간시 회장은 이익채(李益采), 신문을 전담한 회보장(會報長)은 양홍묵(梁弘默), 주필에는 이승만(李承晩)이 취임하였다. 체재는 4호활자, 2단 4면으로 지면배정은 1면이 논설, 2면은 내보(內報), 3면은 외보(外報), 4면은 회중잡보(會中雜報)와 광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발행목적은 동포의 이목을 열어 내외국 형편을 널리 알리고, 2000만 동포가 일심협력하며 국권과 민권을 지키도록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발행소는 배재학당 제1방에 두고 학생들이 번갈아 취재와 편집 및 교정을 보았고, 학당 구내에 마련된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어냈다.
최종호가 되는 제14호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논설을 게재하였는데, 논설에서는 학문의 필요성을 비롯하여 자기직분에 충실할 것, 아동교육의 중요성, 매관매직과 탐관오리의 격퇴 등을 주장하였다.
이 신문은 민간사회신문으로 발행인인 배재학당 학생들은 20세 남짓의 새로운 지식을 먼저 터득한 젊은이들이며, 신문의 독자도 처음부터 일반민중을 상대로 하였다.
1898년 4월 2일 제14호로서 주간은 종간되고, 4월 9일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ᄆᆡ일신문』으로 개제, 발간되었다.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