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불교에서는 용이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로 수용되고 있다. 본래 인도에 살고 있는 용 종족들이 뱀을 숭배한 것이 발전되었으며, 신력이 있어 구름과 비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악신이었던 용은 부처의 설법 속에서 불교의 호법신으로 변신하고 팔대용왕(八大龍王)으로 분류되기까지 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일찍부터 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계룡(鷄龍)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탈해왕은 일찍이 28용왕이 다스렸던 용성국(龍城國)에서 신라로 와서 신라의 4대왕이 되었다. 또 신라의 거타지(居陁知)는 활을 쏘아 여우를 잡음으로써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된다는 등 용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용을 특별히 중요시하게 된 것은 신라의 자장자장(慈藏, 590-658)과 의상(義湘, 625-702)에 의해서였다. 자장은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문수보살에게서 불사리(佛舍利)를 얻은 뒤 중국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홀연히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황룡사에 있는 호법룡이 자신의 아들인데,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황룡사를 지키고 있다고 하면서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권장하였다. 귀국한 자장은 호법룡이 지키고 있다는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다.
또, 자장은 문수보살의 부탁을 받고 영축산 통도사를 창건하여 부처의 사리와 가사(袈裟)를 봉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독룡(毒龍) 9마리가 살고 있는 신지(神池)가 있었다.
자장은 이 악룡들을 위하여 수계하고 설법하여 그들의 나쁜 마음을 항복시켰는데, 그 때 9마리 중 5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3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가고, 오직 1마리가 남아 그 절을 호지(護持)할 서원을 세우므로 작은 못을 만들어 1마리를 머물게 하였다 한다.
이는 설법을 통하여 용의 나쁜 마음을 항복받고 호법룡으로 그 기능을 바뀌게 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를 짙게 풍기고 있다. 그 뒤 우리 나라의 사찰 창건에는 이와 같은 설화가 많이 전해지게 되었다. 즉, 악룡이 살고 있는 명당을 찾은 고승이 설법을 통하여 용을 감화시키고 그 용은 가람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다.
또, 신라 화엄종의 초조 의상은 당나라 유학길에서 그를 사모하는 선묘(善妙)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귀국길에 승속(僧俗)의 길이 다름을 애태우다가, 선묘는 바다에 뛰어들어 의상과 불교를 보호하는 호법룡으로 변신하였다. 그 뒤 의상의 사찰 창건이나 설법의 장소에는 항상 선묘의 변신인 호법룡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와 관련된 설화 중 부석사의 창건설화는 대표적인 것이다. 도둑의 무리가 창궐하던 태백산에 의상이 화엄의 중심사찰을 만들려고 하자 도둑들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호법룡은 큰 바위를 공중에 띄워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 사찰 중 의상이 창건한 대부분의 절들이 용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이와 같은 불교의 호법룡신앙은 호국룡신앙(護國龍信仰)으로 발전하였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문무왕은 항상 왜구를 염려하여 죽은 뒤에는 용으로 변해서라도 왜구를 막으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해를 다비(茶毘:화장의식)하여 동해 큰 바다에 수장(水葬)하였다. 이것이 현재 경주 동쪽의 감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이다.
그 뒤 문무왕은 호국룡으로 바뀌어 동해의 왜구 출몰을 막는 국토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용이 되었다는 것은 뒤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신령한 피리를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후신과 이 호법룡한테서 받게 된다는 설화로 증명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호법룡신앙은 문무왕에 대한 흠모와 아울러 그 뒤 역대 왕에게 계승되어 효성왕과 성덕왕도 그 유명(遺命)에 따라 동해에 산골되었으며, 혜공왕과 경문왕은 감은사로 행행하여 멀리 바다를 망견(望見)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어떠한 불교국보다도 용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사찰의 법당이나 탑 등에 용을 장식하는 것도 모두 용의 호법신 기능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