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이다. 1910년 전라도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한 홍범식이 아들이고, 벽초 홍명희는 손자이다.
1847년 10월 11일 출생하였다. 1875년 4월 경과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877년 4월 홍문관 수찬, 12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1878년 홍문관 부응교, 1879년 1월 이조 참의, 4월 병조 참의·돈녕부 도정, 5월 동부승지, 1880년 6월 우부승지를 두루 지냈다. 1881년 7월 사간원 대사간, 1882년 7월 시강원 보덕과 우부승지, 1883년 6월 성균관 대사성, 1884년 6월 이조 참의, 1889년 9월 예조 참의, 1890년 형조 참판·병조 참판, 1892년 12월 한성부 좌윤, 1893년 1월 돈녕부 돈녕, 7월 우승지, 11월 한성부 우윤을 역임하였다.
1900년 5월 궁내부 특진관(칙임관 4등)과 시강원 첨사, 1901년 3월 장례원 소경, 4월 궁내부 특진관, 1902년 1월 다시 장례원 소경, 2월 궁내부 특진관, 9월 봉상사 제조, 1903년 5월 궁내부 특진관 등을 거쳐 1906년 11월 중추원 찬의(칙임관 2등)에 이르렀다.
1907년 3월 통감부의 유림 회유정책에 편승하여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조직된 친일 유림단체 대동학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8년 기호흥학회 찬무부 임원을 지냈다. 1909년 3월 친일적 상업단체 제국실업회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대동학회 회장, 10월 대동학회의 후신인 공자교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신궁경의회 찬성원으로 참여하였는데, 신궁경의회는 일본의 신궁 숭배를 도입하여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봉안하는 신궁을 건립하여 일본과 한국을 각각 주종관계로 하는 ‘일선동조론’을 구현하려던 단체였다. 같은 해 12월 일진회의 합방청원에 반대하며 이완용이 합병의 주도권을 갖고자 이완용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민연설회에 참여하여 합방에 반대하는 취지의 상주문 작성을 위한 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 후인 1910년 10월 1일부터 1921년 4월 27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군인과 가족을 위해 경성군인후원회에 4원을 기부하였으며, 1915년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에 정회원으로서 금전을 기부하였다.
1918년 10월 10일에 종4위에 서위되었다. 종4위 이상은 「서위조례」에 따라 작위에 준하여 예우를 누리기 때문에 종4위에 서위된 것은 남작 작위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920년 9월 29일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5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