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 전등사(傳燈寺)의 말사였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1115년(예종 10)에 묘응(妙應)이, 1216년(고종 3)에 정각국사(靜覺國師)가 이 절에 와서 머물던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민왕대에 옛날 계조암(繼祖庵) 터에 중건하였다.
공민왕대인 1370년 경 지공화상(指空和尙)의 부도를 세웠으며, 1539년(중종 34) 평원대군(平原大君)과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위패를 모시고 재(齋)를 올렸다. 1644년(인조 22) 숭해장로(崇海長老)가 중창하여 8년 만인 1652년(효종 3) 봄에 완공하였으나, 새로 건축한 건물이 이 해에 타버리자 숭해는 다시 8년 동안 중건하여 불전과 요사채를 세웠다.
1679년(숙종 5) 종념(宗念)이 북과 종 1좌를 조성하였고, 1706년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779년(정조 3) 염파(艶葩)가 대웅전 후불탱화(後佛幀畫)를 조성하였고, 1803년(순조 3) 월은(月訔) 등이 포응당비(抱應堂碑)를 세웠으며, 1806년 의민(義旻)이 응진전(應眞殿)을 중수하였다. 1854년(철종 5)과 1865년(고종 2) 적묵당(寂默堂)이 화재로 소실되자 무경(無鏡)과 용파(龍波)가 각각 중건하였다.
1878년 우담(藕潭)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명부전을 새로 지었으며, 향각(香閣)을 옮겨 짓고 대루(大樓)를 중수하는 등 많은 불사를 이루었다. 1899년 미산(眉山)·용파 등이 응진전을 중수하고, 이듬해 운하당(雲霞堂)을 재건하였다. 또한, 주지 이지영(李智永)은 1905년 응진전 개금불사(改金佛事), 1908년 적묵당 중창, 1912년 만세루 중건, 1919년 영산전(靈山殿) 존상의 개금을 하였다.
1923년 황초암(黃楚岩)이 법전(法殿) 불상을 개금하였고, 1927년 2월의 실화로 적묵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황초암·이경화(李鏡華) 등의 노력으로 7년 만에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1934년 공장(工匠) 김치운(金致雲)을 초청하여 900근의 종을 주조하였고, 1936년 주지 이경화가 대웅전의 존상과 명부전의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였으며, 이듬해 비구니 김자형(金自馨)이 토지 677평을 희사하였다.
중요 문화재로는 7층탑을 비롯하여 지공화상탑(북한 국보급 제134호), 각종 불보살상과 탱화,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 지공이 가지고 온 우두전단(牛頭栴檀) 및 패엽(貝葉)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