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나라의 화폐단위는 일정량의 금이나 은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화폐 단위는 단지 계산 단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에 은병(銀甁)·해동통보(海東通寶)·쇄은(碎銀)·소은병(小銀甁) 등이 주조·발행되었지만,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포화(布貨)나 곡화(穀貨), 특히 미화(米貨)였다. 이들 사이의 교환비율은 문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기(前期)에 정부불환지폐라고 말할 수 있는 저화(楮貨)가 발행되었고, 또 동(銅)으로 조선통보(朝鮮通寶)·전폐(箭幣)와 같은 화폐가 주조, 발행되었지만 일정한 화폐 단위가 확립되어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저화는 장(張)으로 헤아리고 있었으며, 더구나 일반 민간에서는 역시 포화나 곡화, 특히 미화가 물품화폐로서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화폐 단위가 확립된 이후 그 변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숙종연간(1675∼1720)에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분산적으로 널리 주조, 발행되어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국경지방을 제외하고는 상평통보가 거의 전국적으로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화폐형태이기는 했지만, 일단 화폐경제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상평통보는 흔히 엽전(葉錢)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개수화폐(個數貨幣)인 상평통보를 민간에서 한 닢[葉]·두 닢 등으로 헤아린 데서 유래된 것이다. 『속대전』 국폐조(國幣條)에 “국폐에 동전을 사용한다.
동전에는 ‘常平通寶’라는 각자(刻字)가 있고, 1문(文)의 무게는 2돈[錢]5푼[分]이다. 100문은 1냥(兩)이 되고 10냥은 1관(貫)이 된다. ”는 화폐산식(貨幣算式)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부 율기육조(律己六條) 제5장 절용(節用)과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 전화조(錢貨條)에서 보는바, 실제로는 문과 냥 사이에 전(錢)이라는 단위가 존재하고 있어 ‘1관=10냥=100전=1,000문’이라는 십진법에 의한 화폐산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기본이 되는 화폐 단위는 냥이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을 지나 1883년 7월 상설적인 조폐기관으로 전환국(典圜局)이 설립되었으며, 1886년에는 전환국이 독일에서 신식 조폐기기를 수입하여 1887년 10월 경성전환국(京城典圜局)이 새로 발족되었다. 그 당시 전환국에서 조폐기기와 함께 각인(刻印)을 도입하였는데, 그 종류는 14종에 달하였다.
이때 우리 정부는 환(圜, 또는 원, 본고에서는 환을 사용함)이라는 화폐 단위를 냥과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사용하고 있던 전이라는 단위가 빠져 있었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경성전환국에서 제조된 것은 1환 은화와 5문과 1문의 적동화 등 3종이었는데, 이들은 소량에 그치고 발행되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1892년에 경성전환국은 인천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화폐는 5냥 은화,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등 5종이었다.
1891년에 정부에 의해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가 작성, 준비되고 있었는데, 이 조례에서 본위화폐로는 1냥 은화와 5냥 은화로 제정되어 있었다.
전자는 국내에서, 또 후자는 대외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보조화폐로는 2전5푼 백동화, 5푼 동화, 1푼 구전화(舊錢貨)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화폐산식은 ‘1냥=10전=100푼’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신식화폐조례」는 결국 공포되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1892년에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된 5종의 화폐는 이 조례의 공포를 예상하고 제조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더욱이 1893년 인천전환국에서는 화폐가 전혀 제조되지 않았다.
1894년 7월 11일에 우리나라는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함으로써 근대적 화폐제도로 이행하게 되어,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때 ‘1냥=10전=100푼’이라는 십진법에 의한 화폐산식이 정하여졌는데, 기본적인 화폐 단위는 냥이었다.
그리고 본위화폐는 5냥 은화(엽전 500문) 하나뿐이고, 이는 대외 거래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조화폐로는 1냥 은화(엽전 100문), 2전5푼 백동화(엽전 25문), 5푼 적동화(엽전 5문), 1푼 황동화(엽전 1문) 등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장정이 공포된 이후로 5냥 은화는 전혀 제조된 바 없으며, 다만 1892년에 제조된 후 사장되어 있던 5냥 은화가 이 장정에 의해 발행되었을 뿐이다.
「신식화폐발행장정」 제7조에 신식 화폐를 많이 주조하기에 앞서 본국 화폐와 동질·동량·동가인 외국 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개항장에서 5냥 은화와 동질·동량·동가인 외국 화폐로는 주로 일본의 1원(圓) 은화와 멕시코 은화(Mexican dollar)가 유통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1889년부터 제조되기 시작한 1원(元) 은화가 어느 정도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화폐 단위인 원(元)은 정식으로는 원(圓)으로 써야 하는 것이지만, 원(圓)이 획이 많고 복잡하므로 음이 같다는 이유로 원(元)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원(元)으로 표시된 은화가 이른바 은원(銀元)이고, 이는 18세기 이래 중국에 많이 유입한 멕시코 은화를 모방하여 주조된 것으로 ‘1元=10角=100分 또는 100仙’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전술한 제7조에 의거하여 이 장정이 공포된 이후 우리 정부는 일본의 원(圓)을 외면하고 중국의 원(元)을 정식으로 화폐 단위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 부문에서는 거의 모두 원(元) 단위가 사용되어 ‘1元=100錢=1,000厘’라는 화폐산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한편, 민간 부문에서는 엽전이 여전히 널리 유통되고 있었으므로, 주로 ‘1냥=10전=100푼’이라는 화폐산식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에 이르기까지 원(元)과 냥(兩)의 두 화폐 단위가 혼용되는 상태에 있었다.
1886년에 독일에서 조폐기기를 수입했을 때 환(圜)이 들어 있는 각인이 도입되었고, 또 경성전환국에서 실제로 환은화가 주조되었다고 함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은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이행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1898년 7월 27일에 금화를 주조하여 본위화폐로 하고, 은화를 주조하여 보조화폐로 삼는다는 것이 관보에 기재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도의 채택을 내용으로 하는 「화폐조례」가 공포된 것은 1901년 2월이었는데, 이것이 ‘광무 5년의 화폐조례’이다. 이 조례는 근대적인 화폐조례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조례는 금화폐의 순금양목(純金量目) 2푼(750㎎)으로써 가격의 단위로 정하고, 이를 환(圜:원이라고도 불림)이라고 부르기로 함으로써 ‘1환=100전’이라는 화폐산식이 정해졌다. 따라서 1886년부터 사용되어 오던 환이 이때 정식 화폐 단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한 화폐 단위 환(圜)은 이전에 주로 정부 부문에서 사용되어 온 원(元), 또 주로 민간 부문에서 사용되어 온 냥(兩)과 혼용되는, 말하자면 화폐 단위의 혼란상태를 가중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1903년에 공포된 「중앙은행조례」나 「태환금권조례」에는 환(圜)이라는 화폐 단위가 사용되고, 원(元)과 냥의 화폐 단위도 종전대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1898년 8월 고종의 명에 의하여 인천전환국이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1900년 9월에 용산전환국이 본격적으로 조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화폐조례」에 의한 본위화폐인 금화폐 20환·10환·5환은 1901∼1904년간에는 전혀 주조된 바 없었으며, 보조화폐인 백동화가 주로 주조되었고, 반환은화와 적동화가 약간 주조되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1901∼1905년간에는 화폐 단위에 있어 환(圜)·원(元)·냥(兩)의 혼용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환(圜)이 원(元)이나 냥을 구축하고 화폐 단위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광무 9년의 화폐개혁’에 의해서였다.
이전의 ‘1元=5兩=1圜’의 등가관계가 이 화폐개혁으로 신화와 구화의 교환비율이 ‘2元(=10兩)=1圜’으로 책정됨으로써 우리나라 화폐의 가치는 2분의 1로 절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동화에 차등 교환이 행해지고, 또 보조화폐 중에서도 보조화폐라고 생각되던 엽전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어, 우리나라의 화폐적 자산은 3분의 1로 감축당하게 되었다.
한편, 전환국이 폐지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폐기기는 모두 일본에 수탈당하였고, 또 우리나라의 고유한 신용수단인 전통적인 어음 발행이 금지되고, 또 이전의 중앙과 지방, 지방과 지방 사이의 금융을 원활히 소통시키고 있던 외획제도(外劃制度)도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화폐와 금융에서 거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여 필연적으로 금융공황이 불어닥치게 되어, 경제는 침체의 나락 속에 빠져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는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희생 속에 강행된 ‘광무 9년의 화폐개혁’에 의해 환(圜)이라는 화폐 단위는 이전의 원(元)이나 냥을 구축하면서 화폐 단위의 일원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또 이 개혁에 의해 우리나라에 금본위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화폐산식은 ‘1환=100전’으로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세계의 화폐개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탈적인 화폐개혁을 일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로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는 이전의 환(圜)에서 일본의 화폐 단위인 원(圓, 약자 円)으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1환이나 1원의 금 가치는 똑같이 순금 2푼(750㎎)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별문제가 따르지 않았다. 1910년 11월 20일 한국은행이 12월 1일부터 한국은행권 1원권을 발행한다고 공고함으로써 화폐 단위가 이전의 환에서 일본의 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행된 한국은행권에는 앞면에는 ‘일원·壹圜’, 뒷면에는 ‘壹圓’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1910년대에 이 땅에서 유통되고 있던 은행권은, 1902년 5월부터 발행되어 거족적인 배척운동을 겪었던 원(圓)으로 표시되어 있는 다이이치은행권(第一銀行券), 환(圜)으로 표시되어 있는 한국은행권, 원(圓)으로 표시되어 있는 조선은행권 등 세 가지였다.
그런데 조선은행권은 1914년 9월 1일에 100원권이 먼저 발행되고, 1915년 1월 4일에 1원권, 또 같은 해 11월 1일에 5원권 및 10원권이 발행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다이이치은행권과 한국은행권이 회수되기 시작하여, 점차 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통일되었다.
원(圓)이 화폐 단위로 채택되어 있었을 때 화폐산식은 ‘1원=100전’이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1전=10리(厘)’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은행권은 태환은행권(兌換銀行券)으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그의 정화준비(正貨準備) 속에 일본은행권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에 의해 그 수량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조선은행권의 일본은행권에 대한 종속성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931년 12월 일본은 금본위제도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관리통화제도로 이행되었다. 이때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였던 원(圓)과 금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조선은행권도 실질적으로 불환지폐(不換紙幣)로 되어 버리고, 또 이때부터 우리나라도 관리통화제도로 이행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원(圓)이라는 화폐 단위는 1945년 8·15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6월 12일에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서 업무를 보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6·25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수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남침해 온 북한군은 아직 발행되지 않고 있던 조선은행 1000원권을 불법으로 발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은행 100원권을 인쇄하여 마구 남발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1950년 8월 28일 대통령의 긴급명령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에 따라 전시은행권교환조치(戰時銀行券交換措置)가 단행되었다.
이 전시에 행해진 조처에 따라 이전의 조선은행권은 새로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되었는데, 이는 1950년 9월 15일에서 1951년 4월 30일까지 지역에 따라 4차에 걸쳐 행해졌다. 이로써 조선은행권은 사라지고 한국은행권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지만, 화폐 단위는 이전대로 원(圓)이 사용되어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인플레이션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 1950년에 들어서면서 경제는 어느 정도 안정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6·25전쟁이 돌발하여 동족상잔이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민족적 참상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서는 악성 인플레이션이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이를테면 1947년을 기준으로 전국소매물가지수는 1953년 1월에 65배 이상 올라 우리나라 경제계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2월 24일에 ‘1953년의 통화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원(圓)이라는 화폐 단위를 버리고, 우리 나라의 과거 화폐 단위인 환(圜)을 되찾게 되었다. 이 개혁에서 신화와 구화의 교환비율은 ‘1:100’이었으며, ‘1환(圜)=100전(錢)’이라는 화폐산식이 채택되었다.
‘1953년의 통화개혁’이 단행된 지 10년도 되지 않은 1962년 6월 12일에 다시 ‘1962년의 통화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개혁에 따라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글로 된 ‘원’이라는 화폐 단위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데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돌이켜보건대, 환(圜)이라는 화폐 단위는 우리나라의 화폐사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어 왔지만, ‘1962년의 통화개혁’에 따라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신화와 구화의 교환비율은 ‘1:10’이었고, 또 화폐산식은 ‘1원=100전’이었다.
실은 ‘1962년의 통화개혁’은 같은 해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산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단행되었지만, 이 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악성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경제계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통화개혁을 단행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강력히 추진해 온 수차의 경제개발계획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빈곤의 악순환을 타파하고, 1970년대 말에는 중진국에 돌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화폐는 곧 그 나라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원’이라는 화폐 단위를 채택한 이래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여, 오늘날 ‘원’화는 국제경제나 국제금융에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우리는 원화가 앞으로 국제경제나 국제금융에서 더욱 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모든 국민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