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 지은 설화 ( )

구비문학
작품
신라시대, 효녀 지은에 관한 설화.
이칭
이칭
빈녀양모, 연권녀설화
작품/문학
편찬 연도
1145년(삼국사기), 1281-1289년(삼국유사)
간행 연도
13세기 후기(삼국사기), 1310년대(삼국유사)
작가
김부식, 일연
내용 요약

「효녀지은설화」는 신라시대 효녀 지은에 관한 설화이다. 가난한 딸이 자신을 희생해 어머니를 봉양한 내용의 이야기로, 대표적인 효행담(孝行談)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8 「열전(列傳)」 제8 「효녀 지은(孝女知恩)」편과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편에 실려 전하는데, 두 문헌에 수록된 이야기는 세부 내용이 다르지만 전체 서사의 전개 흐름은 대동소이하다.

정의
신라시대, 효녀 지은에 관한 설화.
전승 및 채록

「효녀 지은 설화」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48 「열전(列傳)」 제8 「효녀 지은(孝女知恩)」편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유사한 이야기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편에 실려 전한다.

내용

『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8 「효녀 지은」편에 수록된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효녀 지은은 오늘날 경주 지역에 사는 백성인 연권(連權)의 딸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나이 32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오로지 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품팔이나 구걸을 해도 어머니를 봉양하기 어려웠고, 결국 지은은 쌀 10여 석에 자신을 팔아 부잣집의 종이 되었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숨기던 지은은 사실을 알아챈 어머니가 절망하여 울부짖자 함께 울었다. 지나가던 주1이 사연을 듣고 효성에 감복하여 곡식 100섬과 옷을 보내고 몸값을 갚아 효녀 지은의 신분을 양민으로 되살려 주었다. 소식을 들은 그의 주2들도 각각 곡식을 보냈으며, 왕도 이를 알고 곡식 500섬과 집을 하사하였다. 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3을 면제해 주었으며, 곡식이 많아져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군사들을 보내 집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지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사는 마을을 '효양방(孝養坊)'으로 칭하고 그녀의 미담을 널리 알렸으며, 효종랑의 행동도 치하하여 자신의 형인 헌강왕의 딸과 혼인하게 해 주었다.

『삼국유사』 권 5 「효선」 제9 「빈녀양모」편에 실린 이야기에서는 효종랑이 주4에 나가 놀다가 문하생들에게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한 한 효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으로 그려진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수록된 효녀 지은의 이야기와 거의 같다. 다만, 효종랑이 직접 모녀의 통곡 장면을 목격하지 않고 이를 문하생들에게 전해 듣는 것, 사연을 전해 듣고 하사품을 내린 왕이 진성여왕인 것, 그리고 효녀의 집이 나중에 '양존사(兩尊寺)'라는 절이 된 것만 다르다.

의의 및 평가

효녀 지은의 이야기는 자신의 몸을 팔아 부모를 봉양한 효행담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효행담에서는 자신의 몸을 파는 주5 주6가 서사 전개의 핵심 사건을 구성하는데, 이 때문에 희생의 맥락에서 주제를 탐색하기도 한다. 자신의 몸을 던져 부모를 봉양하는 효행의 서사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고소설 「심청전(沈淸傳)」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설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삼국유사』 소재 이야기의 경우 서사 말미에 '양존사'라는 절의 창건 유래담이 덧붙어 있어 사찰(寺刹) 연기(緣起) 설화의 한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8 「효녀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효선」 제9 「빈녀양모」

논문

강성숙, 「효행 설화 연구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효행 양상을 중심으로」(『동양고전연구』 48, 동양고전학회, 2012)
신호림, 「‘貧女養母'條에 나타난 賣身의 불교적 수용맥락과 의미」(『우리문학연구』 50, 우리문학회, 2016)
심우장, 「효행설화와 희생제의의 전통」(『실천민속학연구』 10, 실천민속학회, 2007)
주석
주1

신라의 화랑(?~?). 성은 김(金). 아명은 화달(化達). 당시의 이름난 효녀였던 지은(知恩)이 가난하면서도 효성이 지극함에 감동하여 조 100석을 주고 양민이 되게 도와주었다. 진성 여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 우리말샘

주2

신라 때에 둔 화랑의 무리. 우리말샘

주3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사업을 위하여 보수 없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 우리말샘

주4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 신라 때에 연회를 하던 정자. 왕과 신하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돌 홈의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정자는 없고 물길만 남아 있는데, 물길은 22미터이고 높낮이의 차는 5.9cm이다. 우리말샘

주5

몸값을 받고 남의 종이 됨. 우리말샘

주6

반복하여 나타나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낱말ㆍ문구ㆍ내용을 이르는 말. 설화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별한 임이나 서양 동화의 요술 할머니 또는 미녀 따위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