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효시(梟示, 梟市)라고도 한다. 참수(斬首)한 뒤에 일반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중국의 상고시대인 황제(黃帝) 때부터 모반자(謀反者)에게 처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구장률(九章律)에서는 오형(五刑)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역사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1160년(의종 14)에 어미를 죽인 군졸인 장언(張彦), 1176년(명종6) 군사를 일으켜 무신정권에 대항한 조위총(趙位寵), 1363년(공민왕 12)에는 역모를 꾀한 석기(釋器)를 효수(梟首)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김종서(金宗瑞) 부자 · 황보인(皇甫仁) 등 10인을 저잣거리에서 효수하였고, 박기년(朴耆年)을 비롯한 5인도 백관(百官)을 군기감 앞길에 둘러 세워 뭇사람이 보는 가운데 거열(車裂)로 죽인 뒤 3일 동안 효수하였다. 1467년(세조 13)에는 세조의 정책에 반대해 난을 일으킨 이시애(李施愛), 이시합(李施合)을 효수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을 통쾌히 여기며 막대기나 돌로 머리를 쳤으며,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효시된 머리에 오물을 씌우고 욕을 했다고 한다. 1525년(중종 20) 3월에도 대역죄인 11인을 남시(南市)에서 능지처참한 뒤 3일 간 효수하고 사방에 전시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효수형에 처하는 죄가 늘어나 모반 죄인뿐 아니라 관곡(官穀)이나 군기(軍器) 등에 관한 죄에도 적용되었다. 색리(色吏)로서 명목을 거짓으로 불려서 나라의 곡식을 훔친 자, 세금이나 공물을 싣는 배를 고의로 파손한 자, 세금으로 낸 쌀에 물을 타거나 10석 이상 훔친 자, 군기(軍器)를 훔친 자, 군병(軍兵)으로서 도망을 세 번 한 자 등에게도 이 형벌을 내렸다. 이에 1625년(인조 3) 훈련도감에서 도망한 군사 최득남(崔得男)을 군사들 앞에서 효수하였고, 1627년(인조 5) 종묘의 제기를 훔친 예조(禮曹) 서리 장애현(張愛賢)을 효수하였다. 이 밖에 국경을 넘어가거나 옥문을 부수거나 군사(軍士)가 작당해 난동을 부리거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말을 퍼뜨린 경우 등에도 효수를 행하였다.
효수 장소는 형장(刑場)인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저잣거리였다. 참수할 때 장대를 삼각(三脚)으로 세우고 죄인의 상투 끝에 끈을 매달아 연결한 후 머리를 베어 그 끈을 잡아 당겨 장대 끝에 매다는 방식이다.
이 형은 1894년(고종 31) 12월 27일 칙령 제30호에 의해 참형과 능지처사 형이 폐지됨에 따라 함께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