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주의는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원리와 관련되는 용어로서, 북한에서는 1951년에 나타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당시 노동당원으로 입당시켜야 할 사람들을 지나치게 또는 자의적으로 제한하는 잘못된 경향 또는 정책을 일컫는다.
1951년 12월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4차 전원회의에서 당시 당부위원장이자 조직담당 비서였던 허가이(許哥而)에 의해 저질러진 관문주의적 오류를 지적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관문주의는 한국전쟁 시기에 조선로동당 안에 숨어있던 반당종파분자들에 의한 당 장성사업과정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노동자 성분비율만 강조하면서 선진적인 근로농민들과 지식인들을 당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선진적인 노동자들도 조직적 단련이 부족하다느니, 수준이 낮다느니, 근무연한이 짧다느니 하는 부당한 조건과 구실을 붙여 이들의 입당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관문주의란, 당·사회단체·문화단체·기관·학교 등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만들어 많은 성원들이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경향을 뜻한다. 북한에서 관문주의라 함은 당이 정상적으로 새로운 당원들을 당의 대열에 받아들여서 당 장성을 보장하는 대신, 까다로운 입당 조건을 붙이어, 새 당원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적게 받아들여 당 대열 확장을 저애하는 경향을 말한다. 북한 노동당 지도부 내에서 관문주의를 범했다고 지적을 받은 대표적인 자는 당 조직 담당 부위원장을 지낸 허가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작전 지휘권을 중공군에 이양한 김일성은 1951년부터 그 동안 크게 신경쓰지 못한 당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당을 전담하고 있던 허가이와 당 사업 문제를 두고 갈등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허가이가 당 사업 방식을 채벌을 위주로 하는 책벌주의와 노동자의 비율에만 매달려 당의 문을 다는 관문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비판을 이론적·실무적으로 뒷밭침한 것은 허가이와 같은 소련계 한인이었던 박창옥(朴昌玉)과 박영빈(朴英彬)이었다.
결국 이 비판으로 1948년 9월 이래 당을 전담해오던 허가이는 제1비서 자리에서 해임되고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되었다. 물론 당시는 전시였고 농업생산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농업담당 부수상은 결코 한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을 전담하던 허가이로서는 대단히 불만스러운 조치였다. 결국 그는 미군 폭격을 받아 무너진 순안저수지 복구사업을 현장 지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에 불복하고 1953년 7월에 자살하였다. 자살 후 그는 김일성 지도부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반당종파분자, 혁명의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관문주의는 공산독재통치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우선 당에서의 관문주의는 새로운 입당할 대상들의 출신 성분·사회성분·가족·친척·인척관계·학력·경력 등에 대한 까다로운 조건 제시로 진행되며, 정세 변화에 따라 일시에 많은 당원을 흡수하여 그의 정비를 위해 당의 문을 닫아 놓는 형태로도 감행된다.
다음 대학교들에서의 관문주의는 적대 계층·동요계층에 속하는 성분을 지닌 사람의 입학을 철저히 봉쇄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또한 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산주의적인 것 이외의 다른 사상·문화 등이 유입되는 것이 두려워서, 외국과의 교류를 거부하여 문을 닫아 매는 형태로 관문주의가 표현된다. 지금 공산 국가들은 자유 진영과의 거래에 있어서, 이 관문주의를 적용시키고 있다. 소위 ‘혁명수출’을 위해서, 약소민족 국가나 후진국들에 적극 진출하고 있는 자들이 자유 진영 선진국과의 거래는 지극히 조심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실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