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인민의용군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또는 군인이다.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선포한 ‘전시동원령’에 근거해 모집되었다. 개전 초에는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이 자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7월 2일부터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 등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다. 한국전쟁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의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전시동원령에 따라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또는 군인.
개설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북한 노동당도 7월 6일 ‘의용군 초모(招募) 사업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각급 당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군으로 하되 빈농 출신의 청년을 많이 끌어 들일 것, 각도에 할당된 징모 수는 책임을 완수할 것, 전 남로당 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 등을 밝히고 있다. 이 결정에 따라 각급 당조직에서는 의용군 모집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민청을 비롯한 각급 사회단체에 지시했다.
의용군 모집 대상과 모집 방식은 전선의 변화 추이에 따라 달리했다. 개전 초기에는 주로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을 대상으로 ‘자원’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다가 7월 2일부터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 등을 통한 집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 형태의 모집방식은 개인적 영웅심과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일시에 다수의 인원을 모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북한은 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 · 청년 · 학생 · 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는데, 특히 청년과 학생단체인 민청과 민주학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체들은 군중대회 또는 궐기대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매체와 강연회, 가두연설 등 조직적인 선전과 홍보활동을 통해 의용군을 모집했다.
기능과 역할
한편, 각도에서는 1950년 9월 초에 의용군을 중심으로 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경북에서는 안동여단, 충남에서는 대전여단, 전남에서는 광주여단 등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총지휘하는 의용군 총사령관에는 노동당 부위원장인 이기석이 임명되었다.
현황
의의와 평가
이 때문에 더 많은 인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책임동원의 성격이 강한 할당제로 의용군 모집방식이 바뀌었다. 가두모집과 호별 할당 등 강제성을 띤 징집이 동원되었는데, 무리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민청과 직업동맹 등의 간부들이 각지에 파견되어 가두모집을 추진하였다. 마을 단위에서는 제비뽑기나 마을의 논의구조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이 빈번해지기도 했다.
참고문헌
- 『남로당연구(南勞黨硏究)』(김남식, 돌베개, 1984)
-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 제2권』(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79)
- 「민중(民衆)의 전쟁인식(戰爭認識)과 인민의용군(人民義勇軍)」(배경식, 『역사문제연구』제6호, 역사문제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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