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大正)4년인 1915년 12월 현재 이왕직아악부 소속 음악인 57명의 이력서를 적어 놓은 서류철이다.
당시 이왕직아악부로 소속이 바뀐 악원들의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펜글씨로 필사한 필사본이다. 책의 판심에 〈국립국악원〉이라는 기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본이 만들어진 시기는 1915년이나 그것을 필사한 시기는 국립국악원이 개원한 후인 1950년대 이후로 보인다. 1면은 1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용은 200면에 달한다. 현재 원본의 소장자는 미상이다.
『장악원악원이력서(掌樂院樂員履歷書)』에는 1915년 당시 아악사(雅樂師)였던 명완벽(明完壁)․김영제(金寧濟)와 안덕수(安德秀) 외 아악수장(雅樂手長) 7명, 최성호[崔聖浩, 崔鶴鳳으로 개명] 외 아악수(雅樂手) 46명의 이력서가 들어 있다. 당시 아악사장은 함화진의 부친인 함재운(咸在韻)이었다. 이력서의 분량은 아악사가 3면으로 가장 많고 아악수장은 2면 반, 아악수는 2면 정도이다. 각 음악인의 이력서 양식을 살펴보면, 본관(本貫)․족적[族籍, 주소]․생년월일(生年月日)․생국군정촌[生國郡町村, 본적지]․성명(姓名)을 쓴 후 학업의 정도와 승진 내용, 월급의 액수 등을 적어 놓았으며, 소속 관아의 변천 역시 자세하게 병기하였다.
예를 들어, 아악사 김영제의 이력서를 보면, 본관은 경주(경상북도 경주)이며, 족적은 경성 서부 인달방(仁達坊) 사직동 60통 3호, 생년월일은 명치16년(1883) 12월 14일, 생국군정촌은 조선국 충청북도 괴산군 내읍, 성명은 김영제라고 되어 있다. 명치25년(1892) 1월에 입학하고 명치 30년 8월 9일에 수료하였으며, 동년(仝年) 11월 1일자로 전악에 임명되어 장례원에서 월급 8엔(円)을 받았다가 명치 37년 9월9일에 6円을 올려 받았다. 명치 41년에 국악사판(國樂師判)·5등9급을 받고, 명치 44년에 이왕직의 이름으로 아악사(雅樂師)가 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임금의 상향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이력서의 양식은 아악수장과 아악사에게 모두 적용되어 나타났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에 전통음악 중 궁중음악을 전승 보존했던 국가기관으로, 『장악원악원이력서』는 이 시기에 활동했던 음악인들의 이력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음악인을 담당했던 기관이 장악원에서 장례원, 궁내부, 조선총독부, 이왕직아악부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악원 음악인의 서열화, 즉 악사집안의 자제는 젊은 나이에 아악수장과 아악사가 된 것에 비해, 일반 악생과 악공은 경력이 쌓여도 아악수장에 오르지 못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