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trot)

대중음악
개념
일제강점기에 일본 엔카(enka[演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중가요. 뽕짝.
이칭
이칭
뽕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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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에 일본 엔카(enka[演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중가요. 뽕짝.
개설

독특한 5음계를 음악적 특징으로 하며, 일본 엔카의 번역 · 번안 노래를 거쳐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 창작이 본격화, 1930년대 중반에 정착된 대중가요 양식으로, 신민요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스탠더드팝이나 포크 등이 강세를 보이는 시기에 쇠락하지만, 새로운 양식들과의 혼융을 통해 계속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내용

트로트라는 말은 서양의 춤곡인 폭스 트로트(fox trot)에서 왔지만, 한국 대중가요의 트로트 양식과 폭스 트로트는 2박자라는 점을 빼고는 관련성이 없다. 트로트는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를 사용하거나,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를 ‘라’의 비중을 높여 사용하는 독특한 음계를 지닌 노래로, 일본 대중가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양식이다. 일제강점기에 이 양식은 특별한 양식명이 없이 ‘유행가’, ‘유행소곡’ 등으로 불리면서, 우리나라 민요의 어법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신민요 양식과 변별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트로트라는 명칭은, 스탠더드팝이 대중화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이 양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굳어지는데, 당시에는 스탠더드팝이라는 명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명명의 지체현상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라 보인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뽕짝’이라는 다소 비하적 명칭이 등장하여 꽤 오랫동안 공식적인 양식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고 이 비하적 명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1980년대 후반에 전통가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적어도 1970년대 이후에는 트로트라는 명칭이 가장 널리 쓰였다.

이 양식은 1920년대 「시드른 방초」 등 일본 엔카의 번역 · 번안곡이 인기를 모은 이후, 1928년 문수일 작사, 김서정 작곡의 「세 동무」에 이르러 창작곡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일명 「황성 옛 터」)을 거쳐, 1934년 고복수가 부른 「타향」(일명 「타향살이」)과 1935년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그 형태가 확고히 정착되었다. 이때부터 트로트는 단조 5음계로 고착되고 주로 2박자에 특유의 꾸밈음을 지닌 노래로 정착되었고, 이 음악적 관행은 1970년대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고복수, 이난영, 장세정, 남인수, 백년설 등의 가수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다. 1940년대 초에 들어서서는 「나그네 설움」(1940)을 비롯한 장조 트로트가 새롭게 등장하여 단조 트로트와 공존하기 시작했는데, 전시체제에 들어서서 단조 트로트가 지닌 강한 비극성을 다소간 약화시켜야 한다는 상황적 요구와, 일본에서 새롭게 유행한 대중가요 경향인 도추모노(道中物)의 영향이 그 원인으로 이야기된다.

트로트의 가사에서 풍기는 정서적 내용은 마치 신파성을 지닌 소설 · 연극 · 영화 등과 거의 동일한데, 세상이나 타인과의 갈등에 대해 해결이나 조정의 가능성이 없이, 스스로 욕망을 꺾고 체념하며 이러한 패배를 자학과 자기연민의 태도와 감정으로 해소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트로트는 대개 매우 애절한 슬픔의 노래이며, 대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행복해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고통 등을 내용으로 삼아 진지한 분위기를 지닌다. 이는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 삶을 즐겁게 노래하는 신민요가 지닌 다소 향락적이라 할 만한 즐거움의 정서 경향과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의 트로트가 형성되고 정착한 시기의 중요 작곡가는, 전수린, 손목인, 박시춘, 이재호, 김해송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방 후에도 트로트 양식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며 인기를 모았고, 특히 분단과 전쟁 등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반영한 「가거라 삼팔선」, 「단장의 미아리고개」, 「꿈에 본 내 고향」 등으로 절창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이 점차 새로운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새로운 미국식 대중가요인 스탠더드팝이 주류 양식으로 안착하면서, 상대적으로 트로트는 대중가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잠시 쇠락하는 조짐을 보인다. 그러나 1964년에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를 계기로 트로트의 인기는 부활하여, 1970년대 초까지 다시 인기를 누린다. 이 시기의 인기 가수는 이미자를 비롯하여,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호,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가슴 아프게」의 남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나훈아, 「물새 한 마리」의 하춘화 등이며, 작곡가로는 백영호와 박춘석이 인기곡을 쏟아냈다. 가수 이미자와 배호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트로트는, 스탠더드팝의 가창 방식을 받아들여 기교적인 꾸밈음을 절제하고 담담하고 중후한 가창을 유지했고, 반주에서도 빅밴드나 캄보밴드의 관현악 반주가 정착했다. 특히 이 시기의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의 트로트와 달리, 시골을 연상시키는 가사가 많이 등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트로트가 시골이나 저학력자, 하층민 등 좀 더 넓은 대중들에게까지 대중화된 결과라고 보인다. 또한 스탠더드팝과 혼융된 양상도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청년문화 붐으로 포크송이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고 록도 함께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들의 인기가 최고조에 도달한 1973, 74년경에는 트로트는 눈에 띄게 위축된다. 그러나 1975년 포크와 록이 대마초사건 등에 연루되어 급격히 위축된 후,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필두로 다시 트로트가 부활하고, 최헌, 윤수일 등 록그룹 출신의 솔로가수가 록 사운드와 트로트 선율을 결합한 「앵두」, 「사랑만은 않겠어요」 등의 노래로 새롭게 인기몰이를 하면서 트로트는 또 한 번의 변신에 성공한다. 이 경향은 1980년대 초의 「미워 미워 미워」 등 조용필의 일부 노래에까지 이어져, 트로트의 비극성을 록의 샤우팅으로 소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트로트는 새롭고 참신한 양식이 아니라 익숙하고 편안한 양식이 되었고, 고학력과 대도시의 젊은 수용자들이 아닌, 유행에 덜 민감한 중장년이나 저학력과 낮은 계층의 취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속칭 ‘뽕짝 메들리’라고 불리는, 옛 인기 트로트 곡을 같은 속도로 단순하게 연주되는 전자악기 반주에 맞춰 끊임없이 이어 부르는 방식의 음반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러한 메들리 음반의 대표 격인 『쌍쌍파티』에서 두각을 나타낸 가수 주현미가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불러 솔로로서의 인기몰이에 성공하면서, 트로트의 인기 경향은 다시 한 번 변화한다. 즉 이전까지 트로트 인기의 중심에 서 있던 단조 트로트의 비극성이 퇴조하고,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지닌 장조 트로트가 새롭게 인기를 모으게 된 것이다. 특히 주현미, 현철, 문희옥 등 이 시기 인기 가수들의 가창은 특유의 비극성을 제거하고, 대신 기교적인 꾸밈음을 강화하여 향락적인 질감을 풍겼다. 가사에서는 관행적으로 슬픔의 표현이 남아있기는 하나, 즐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가사를 압도하여 슬픔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단 트로트 분야에서는 매우 드문 자작곡가수 심수봉만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미워요」 등 특유의 비극성을 유지하는 단조 트로트를 이어갔다.

1990년대 이후 트로트는 비극성을 거의 지니지 않게 되었고, 유흥의 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데에 적합한 신나는 노래로 바뀌었다. 1960년대 말의 「소양강 처녀」나 1980년대 「남행열차」가 1990년대 이후 이런 방식으로 널리 불리는 노래로 정착했고, 새롭게 발표된 태진아, 설운도 등의 노래 역시 신나는 분위기를 지녔다. 이 경향은 2000년대 장윤정이나 박현빈 등의 노래에 이르면 더욱 심화되었으며 음악적으로도 더 화려해졌다. 이즈음에 이르면 트로트는 이미 5음계를 유지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점에서 선율만으로는 오히려 1960, 70년대의 스탠더드팝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즉 1990년대 이후의 트로트는 비극성도 특유의 선율적 특성도 지니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 이르러 트로트라는 말은 특정한 양식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올드패션’의 노래 경향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양식이 정립되던 일제강점기 동안에는 대도시의 세련된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던 트로트는, 이를 압도하는 미국 대중가요풍의 경향이 대두되던 1950년대 후반부터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선, 일본 대중가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양식이라는 점에서 ‘왜색’, ‘일제 잔재’로 청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1960년대 한일수교나 1980년대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이 드세어질 때에, 가장 손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동백 아가씨」 등의 적지 않은 곡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1984년에는 음악전문지와 일간지를 넘나들며 트로트의 일본색에 대해 논쟁한 이른바 ‘뽕짝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외에, 트로트가 지나친 애수의 감정을 담고 있어 퇴폐적이고 불건강하다는 비판 역시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특히 해방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들에게는 트로트의 신파적 질감이 낡고 세련되지 못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비판의 초점이 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한편, 트로트가 지닌 양식적 독특함 덕분에, 이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거리가 확보된 이후에는, 그 의미가 재해석되어 작가주의적인 창작의 재료로 활용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편곡을 통한 리메이크의 재료가 되기도 했다. 작가주의적 활용의 시도는 1970년대 송창식의 「왜 불러」, 정태춘이 짓고 박은옥이 부른 「양단 몇 마름」,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어어부밴드의 「아름다운 ‘세상에’ 어느 가족 줄거리」, 정태춘의 「나 살던 고향」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새로운 편곡을 통한 리메이크로는 1970년대 해바라기의 「추억의 백마강」(원제, 꿈꾸는 백마강), 1980년대 한대수의 「목포의 눈물」에서 시작된 이후, 2000년대에는 블루스 가수인 한영애나 재즈 가수인 말로 등이 트로트를 중심으로 한 옛 가요 리메이크 음반을 낸 바 있다.

참고문헌

『대중음악의 이해』(김창남 편, 한울, 2012)
『한국대중가요사』(이영미, 민속원, 2006)
집필자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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