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병영영지(湖南兵營營誌)』는 전라도 병영의 영지로, 『강영영지(康營營誌)』라고도 한다. 이 책에는 호남병영이 강진에 있었기 때문에 맨 첫 장에 채색된 강영지도를 첨부하고 뒤이어 전라도 병마절도사영(全羅道兵馬節度使營)의 제반사항이 16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1책(12장)으로 된 필사본이며, 크기는 세로 37.6㎝ 가로 30.2㎝이다. 표제는『강영영지』이고, 내제는「호남병영영지」이다. 정확한 편찬과 발간 경위는 미상이다.
호남 육군의 본영인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이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었기 때문에 『강영영지』라는 표제가 붙었다. 표지의 ‘기사(己巳) 칠월(七月)’이라는 표기와 「인품」조에 김우종이 1812년(순조 12) 『순조실록』에 나오는 인물이라 점으로 미루어 1869년(고종 6)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면의 채색지도에 이어 병영(兵營)‚ 성지(城池)‚ 고적(古蹟), 봉대(烽臺), 관직(官職)‚ 공해(公廨)‚ 창고(倉庫)‚ 방물(方物)‚ 물산(物産), 진공(進貢)‚ 환곡(還穀), 발참(撥站), 군병(軍兵), 군향(軍餉)‚ 봉름(捧廩), 인품(人品) 등 총 16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병영」에는 호남 병영의 건치 연혁과 위치, 좌수영, 우수영, 순천전영진(順天前營鎭), 운봉좌영진(雲峰左營鎭), 전주중영진(全州中營鎭), 나주우영진(羅州右營鎭), 여산후영진(廬山後營鎭)과의 거리를 기록했다. 「성지」에는 성의 둘레와 높이, 호지(濠地)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를 수록하였다. 「고적」은 수인산에 있는 신라와 고려 때 쌓은 성터가 유일한 것이며, 「봉대」에는 남연의 봉수가 동쪽 사도로부터 발포, 녹도, 천관산, 원포, 완도 등을 거쳐 수인산에 전해져서 병영에 이른다고 기록되었다. 「관직」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하여 군관, 화사, 심약, 우후 그리고 지방관으로 강진현감, 마도진만호, 고령도진첨사, 가리진첨사, 신지도진만호 등이 있다.
「공해」는 청심각, 망미루, 운주헌, 연희당, 응수당, 진남루, 제승루, 장대, 간검당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병사(兵使) 민섬(閔暹)이 중건한 연희당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며 김종직가 쓴 제영이 있다. 「창고」조에는 조량고, 진휼고, 관청고, 병고, 군기고, 화약고, 남당창, 동창 등이 있고, 「방물」조에는 통개, 흑각궁, 적마전, 대전, 편전, 통아, 인도(引導), 전자, 조총, 대록피, 결궁장피, 삼아록피 등이 있다.
「물산」으로 세목, 반유, 합생, 참빗, 감, 반하, 창술, 길경 등이 있고, 「진공」 물품으로 칠첩선, 백첩선, 칠별선, 유별선, 전죽, 호요도, 의주우, 창병가시목, 조총가시목 등이 있다. 「환곡」조에는 군향미, 군향조, 창외미, 진미, 군작미, 피모 등의 내용이 수록되었고, 「군병」은 기병 3581명, 보병 939명을 비롯하여, 차비군, 진군, 군뢰, 기수군, 취타군, 수용군, 어변군관마정, 기패관마정 등의 인원수가 기록되었다.
「봉름」은 수미 500석을 매년 강진현의 대동미 가운데에서 봉납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인품」조에는 황대중(黃大中), 김억추(金億秋), 김응정(金應鼎), 정원충(鄭元忠), 김정길(金貞吉), 조규환(趙逵煥), 김우종(金禹鍾), 노광원(盧光源), 남팽윤(南彭潤) 등 역대 전라도 병마절도사 명단이 기록되었다.
한편 규장각 소장본인 『호남영지』와 『전라병영영지(全羅兵營營誌)』에는 고적, 봉대, 물산, 환곡, 인품의 항목이 없다. 그 나머지 항목의 내용은 두 본이 동일하나, 다만 「봉름」조에서 「전라병영영지」에는 수미 437석, 「호남병영영지」에는 500석으로 기록된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책은 『전라병영영지』보다 5개 항목이 더 많고, 「봉름」조 수미에서의 작은 차이를 제외하고는 인구수, 병사수, 성지의 크기나 면적 등 모든 내용이 동일하다. 어느 책이 먼저 편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또 하나의 책은 앞서 만들어진 것을 모사한 것이 분명하다. 호남병영의 연혁과 규모 등을 파악하고, 호남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