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 출생. 1929년 평택부용학교 강습소를 졸업한 뒤 16세부터 농악을 시작하여 마을 두레농악의 상쇠를 시작하였고, 이원보단체와 서울남사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성인이 되면서 마을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서 활동을 하였다. 1985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평택농악(상쇠)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최은창은 생업이 농사였기 때문에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걸립패로 활동하였고, 남운형을 중심으로 명인들이 모여 만든 서울의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농악경연대회에 농악패를 구성하여 ‘평택농악’ 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이것이 평택농악의 시초였다. 이후 절걸립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해체되었고, 1980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하여 평택농악으로 대통령상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현재 평택농악보존회(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는 전통적인 두레 농악패로서, 1월에 지신밟기를 하고 농사일이 시작되면 두레풍물을 치면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평택농악은 전통적인 웃다리농악의 가락과 같은 판제를 지니고 있다.
한편 최은창의 생전 구술에 의하면, 그가 선호한 꽹과리 소리는 땡땡거리는 것이 아니라 여운이 길며 자각자각하는 소리였다. 사물놀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숫쇠와 암쇠의 구분이 지금과 같은 뚜렷한 음고의 차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사소리』(한국고음반연구회, 1997)에 최은창의 고사반소리 8분 27초 분량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