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남구만은 1656년(효종 7)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관찰사를 지냈고 이후 대사성과 형조판서를 거쳤다. 이 영정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인 『약천집(藥泉集)』에 아무런 언급이 없어 작품양식 외에 다른 고찰이 힘든 상황이다. 남구만의 초상은 현재 총 4점이 전해져오는데, 이 초상화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 ‘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文人領議政崔錫鼎贊(영의정치사약천남선생진 문인영의정최석정찬)’이라고 쓰여 있고, 좌측 상단에는 대사성 최창대(崔昌大)가 쓴 긴 찬문이 있다. 최창대가 대사성을 역임한 때는 1711년(숙종 37)이므로 이 즈음에 찬문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구만 사후에 작품상에 추서(追書)한 것으로 여겨져 초상을 그린 시기는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이 초상은 관복을 착용하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며 정면상이다. 오사모에 녹포단령(綠袍團領)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높고 옆으로 벋친 사모의 각(角) 역시 길며, 녹포단령의 소매는 길고 좁다. 의습 처리는 굵기의 변화가 없는 일관된 필선으로 간략히 묘사되었다. 의자 위에는 호피(虎皮)가 깔려 있으며 인물의 양 발 사이로 호랑이의 코 부분이 정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러한 도상은 18세기 초 공신도상에서 특징적으로 보인다.
이 초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안면묘사이다. 즉 얼굴 전체에 선묘 대신 엷은 선염을 구사하여 얼굴 표면의 굴곡을 드러냈으며, 피부의 검버섯조차 살갗에 밀착된 듯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이는 선 위주의 안면 처리에서 얼굴의 높낮이를 선염으로 구현함으로써 피부색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단계로 이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남구만초상에 표현된 도상과 선염 위주의 얼굴표현은 18세기 초 영정의 유형과 기법에 있어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