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환지 초상 ( )

심환지 초상
심환지 초상
회화
작품
문화재
조선 후기의 문신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초상화.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초상화.
개설

심환지는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각종 요직을 두루 거치고,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벽파의 영수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1801년(순조 1)에는 영의정으로서 천주교와 남인세력을 탄압한 신유사옥을 일으킨 철저한 보수 강경론자였다. 그러나 이 초상화는 그의 강경한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달리 노쇠한 문인관료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인 필치로 구현한 작품이다. 화면 상단에“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만포 심환지 선생의 초상 議政 文忠公 晩圃 沈先生眞”이라고 쓰여 있어, 이 초상화는 심환지가 영의정이 된 1800년 이후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2006년 12월 29일 보물로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전체 크기는 세로 213.5㎝, 가로 103㎝이고, 화면 크기는 세로 149㎝, 가로 89.2㎝이다. 의자에 앉은 좌안8·9분면의 전신교의좌상으로 양손을 소매에 감춘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바닥에는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고 족좌대 위에 얹은 양발은 벌려 팔자형을 하고 있다.

높은 오사모에 약간 짧은 각(角)을 그렸는데, 신체를 약간 왼쪽으로 튼 것을 감안하여 왼쪽의 각이 오른쪽 것보다 더 짧게 그려졌다. 이는 오사모의 양쪽 각이 동일한 길이로 표현되던 이전 시기와 달리 현실적인 초상화 기법이 적용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손잡이의 나무 질감을 살린 표현이라든지, 두 발 아래 음영이 처리된 점, 원근법이 적용된 족좌대와 화문석, 명암법으로 옷주름의 자연스런 굴곡을 표현한 의복 등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초상화의 사실적인 극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적인 기법이 가장 두드러지게 적용된 부분은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윤곽선은 농담을 조절하여 되도록 입체감 있게 표현하려 했고, 이마와 귓불, 콧잔등, 인중은 환하게, 그 외의 부분은 좀 더 짙은 선염으로 높낮이를 자연스럽게 표출하였다. 특히 움푹 팬 눈두덩은 여러 번 붓질로 농담의 자연스런 번짐 효과를 냈고, 가는 수염과 얼굴 표면의 육리문(肉理文)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등 대상의 요체를 포착하여 인물이 개성을 잘 드러냈다.

특징

생동감 있는 안면의 묘사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복 및 기물 표현이 특징이며, 원근법과 명암법이 적절히 조화된 조선 후기 사실주의 초상화 양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이 초상화의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생동감 있는 얼굴의 사실적인 표현,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복과 기물의 표현 등에서 명암법과 원근법이 적용되어 당시 초상화에서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이명기(李命基)일 가능성이 있다. 질감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기물의 표현과 박진감 넘치는 시각효과를 창출하였으며, 기법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 시기 회화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명품선』(경기도박물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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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황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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