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윤 초상 ( )

이성윤 초상
이성윤 초상
회화
유물
문화재
조선 중기 무신 이성윤(李誠胤, 1570~1620)의 초상화.
정의
조선 중기 무신 이성윤(李誠胤, 1570~1620)의 초상화.
개설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성윤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성종의 4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선전관으로 세자인 광해군을 따라 공을 세워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 초상화는 이때 받은 공신도상인데, 광해군이 재위시 내린 위성공신과 그 후의 익사공신(翼社功臣), 정운공신(定運功臣), 형난공신(亨難功臣)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모두 삭훈되고 공신녹권과 공신도상도 국가에서 수거하여 소각했다. 그래서 광해군 때의 공신상은 지금까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는데, 후손가에 위성공신 녹권과 함께 이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

도상은 17세기 초반의 가장 전형적인 공신도상으로서 단령을 입고 공수(拱手)한 뒤 교의자(交椅子)에 좌안7·8분면 정도로 앉아 있다. 바닥에는 화려한 중국식 채전(彩氈)을 깔고 두 발은 돗자리를 깐 목제 족좌대 위에 약간 팔자형으로 벌린 모습이다. 오사모의 모정(冒頂) 길이는 짧고 옷소매 가운데로 흰 옷소매가 보이며, 단령의 오른쪽 끝에 보이는 내공과 첩리가 가지런하게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의자의 손잡이가 바깥쪽으로 뻗어나가게 처리된 것도 이 당시 공신도상의 한 사례이다.

단령을 보면 기러기와 오색구름의 운안흉배雲雁胸背와 , 문관 2품의 삽금대鈒􆦨帶를 착용하고 있어, 광해군 5년에 위성공신 2등에 녹훈되면서 금산군에 봉해져 2품에 올랐던 벼슬과 일치한다. 1623년(인조1) 위성공신의 서룬이 취소되면서 공신초상이 회수되어 불에 소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 때 조종祖宗의 신주를 봉안하였고, 광해군에게 반대하여 남해로 유배가서 삶을 마감하였다. 이를 계기로 충신으로 인정받아 그의 초상이 현전하게 된 것이다.

특징

공신의 격으로 따지면 위성공신 2등의 공신상이지만, 종실의 어른일 뿐만 아니라 평소 높은 인품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인 듯, 전체적으로 금은이 매우 화려하게 사용되었고 석채(石彩), 진채(眞彩)도 매우 곱고 선명하며 묘사도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초반의 공신상 중에서도 매우 양질에 속하는 초상화라고 판단되며, 그 예가 드문 광해군 때의 공신상으로서 당시의 초상화 연구는 물론, 정치·사회사적으로도 많은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초상화연구』(조선미, 열화당, 1983)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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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황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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