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 등은 알 수 없으며 대몽항쟁기에 몽고에 투항하여 이후 부몽배(附蒙輩)로서 활동하였다.
1268(원종 9) 8월 몽고에 파견된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의 서장관(書狀官) 국학학유(國學學諭) 홍유서(洪惟敍)가 몽고에 있던 고려인 부몽배 김유(金裕)에게 무신집권자 김준(金俊)이 몽고의 친조(親朝) 요구에 반대하여 해도(海島)로 천도(遷都)하려 한다는 계획을 누설한 일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 17일(甲子) 몽고 사신 병부시랑(兵部侍郞) 쾌디[黑的], 예부시랑(禮部侍郞) 은홍(殷弘) 등과 함께 귀국한 신백천(申百川)은 일찍이 홍유서로부터 모욕을 받았던 것을 보복하기 위해 김준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고하였다. 이로 인해 홍유서는 그해 12월에 피살되고 말았다. 이때 신백천은 김유와 함께 우승상(右丞相) 안퉁[安童]의 명을 받고 와서 각종 희귀한 약물(藥物)을 요구하여 고려정부를 크게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