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창원(菖園). 경상남도 함안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친 뒤 16세 전후에 도일했다. 1930년오카야마공예학교(岡山工藝學校)를 거쳐 1935년에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 : 도쿄미술대학의 전신) 칠공과를 졸업했다. 1935년에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약칭 제전)에 동시 출품을 시작으로 각종 미전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과음과 방랑벽 등 지나치게 감성적인 성품으로 작가활동이 부진했으며, 순탄치 않은 생을 마감했다.
선전과 일본 제전,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를 무대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1946년에 자신의 호를 딴 ‘창원공예연구소’를 개설하였고, 잠시 청진중학교 교사로 근무 중 6. 25를 맞아 월남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사라벌예술대학 강사를 거쳤고,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74년과 이듬해에 연이어 두 번의 개인전을 연 뒤, 1977년에 전시회 준비 도중 작고하여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조선후기 이후에 단절된 건칠 공예기술을 복원해낸 성과와 더불어, 기술 중심의 전통적 제작환경을 작가 중심의 근대적 예술활동으로 전환하는데 기여했다. 대표작으로 2009년에 근대문화재(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칠반(乾漆盤)」을 꼽을 수 있으며, 기형을 기하적인 각면으로 처리하여 화병과 과반 등을 제작하는데 능숙했다.
그의 기술은 일본에서 익힌 것이었지만 무늬 표현에서는 일본 전통기법인 마키에 (蒔繪)기법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우리나라 전통에 부합되는 자연 주제인 포도, 석류, 나비, 물고기, 대, 보리이삭 등을 자개무늬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특색과 세련미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무문건칠기로서 특유의 돌출평행선을 기형표면에 무수히 나타내거나 8-24각의 각면으로 한 화병을 들 수 있다.
1933년 제 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시회8각과자기'를 첫 출품하여 특선하였고, 제 19회까지 매회 출품하여 특헌함으로써 1940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38년에는 일본 천황 접견실의 실내장식을 위촉받아 옻칠로 시공하기도 하였다.
일본 총리대신상(1935), 조선총독부상(1935), 이왕가상(1936), 문교부 예술상(1949), 서울시문화상(1956)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