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직미술품제작소 ()

공예
단체
1908년에 이왕가에서 설립한 공예품 제작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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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8년에 이왕가에서 설립한 공예품 제작시설.
개설

이왕가의 내탕금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공방을 설립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인 1937년경까지 30여 년간 운영되면서 전통 공예기술의 전승적 기반을 만들고, 나아가 그 전통을 오늘에 전하였다. 이러한 공예기술의 전승활동은, 현대공예의 모태 구실을 한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의 역할과 더불어 중요한 근대 공예의 산실로 평가된다.

설립목적

설립 초기에 ‘공예전통의 진작’을 표방하며 공예를 통한 산업의 발전을 모색하였으며, 기술에 대해서는 전통적 기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공장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취지가 지속되지 못했다.

내용

설립할 당시에는 ‘한성미술품제작소’로 출범하였으나, 1911년에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 1922년부터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명칭과 함께 운영주체가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제작활동의 성격도 상품을 생산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금공부와 목공부, 염직부로 출범하여 1910년경에는 수요층의 요구에 따라 제묵부(製墨部)와 도자부를 추가로 신설하였다. 또한 최초로 도안을 도입하여 공예분야에 근대적 제작 방식을 보급하고 선도했다. 금공부는 주로 중국 청동제기의 형식을 은으로 재현한 소형 기념품 제작하였고, 목공부는 나전칠기를, 도자부는 당시 애호층 사이에 수집 열풍이 거셌던 청자 비색의 재현에 각각 주력하였다. 모든 제작품에는 이왕가의 오얏꽃 문장을 새겨 넣어 차별화를 시도하였고, 운영주체가 이왕가와 무관하게 된 1910년 이후에도 이 문장은 상업적 목적에 따라 지속적으로 새겨졌다.

의의와 평가

전통이 급속히 해체되던 시기에 전통 공예기술을 경공장의 수준으로 복원시키려던 시도와 장인 재교육을 시행한 준교육 시설로서도 의의가 적지 않다. 또한 이곳에 몸담았던 장인들이 1960∼70년대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는 등 전통공예의 현대적 전승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특수한 여건에서 일부 선진 기술의 형태로 들어온 외래 기법이 전통과 뒤섞여 혼란을 초래했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한국 근대공예사론-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최공호, 미술문화, 2008)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연구」(최공호, 『고문화』34,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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