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고산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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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이칭
이칭
고산동고분군, 고산리고분군, 식물원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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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대성구역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평양 고산동고분군은 대성산의 소문봉 서남쪽 기슭에서 대동강 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 기슭, 곧 당산마을 북쪽에 조성된 20여 기의 고구려시대 무덤들로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된 고분 가운데 고산동 1호분, 고산동7호분, 고산동 9호분, 고산동10호분, 고산동15호분, 고산동20호분 등은 벽화고분이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한 차례 조사되었다. 해방 이후 1958년 5월부터 1961년 5월까지 진행된 5차례의 대성구역 고구려고분군 발굴을 통해 무덤구조와 벽화 내용이 확인되었다.

내용

1937년 한 차례 조사되었던 고산동1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한국전쟁 시기에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발굴 당시 방대형인 흙무지〔封土〕의 밑면 한 변 길이는 20m 가량이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조성되었으며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널길〔羨道〕은 널방〔玄室〕남벽 동쪽에 치우쳐 설치되었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으로 무덤칸 상부의 파괴가 심하여 천장구조는 알 수 없다. 남은 벽체의 높이는 1.5m 가량이다. 회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나 회가 떨어진 부분이 많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다. 무덤구조와 사신 표현에 적용된 기법 등으로 보아 고산동1호분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동7호분 흙무지의 외형은 방대형이며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23° 치우친 남향이다. 널길과 동서 감(龕)이 있는 긴네모모양〔長方形〕의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앞방 서쪽 감의 천장은 평행고임 위에 꺾음천장이 더하여진 이른바 배집천장이며, 동쪽 감의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이다. 무덤칸 안에 회칠을 한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나 회벽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 벽화내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생활풍속 위주의 벽화구성 등으로 보아 고산동7호분의 축조는 5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듯하다.

고산동9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원형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발굴 당시 흙무지의 외형은 방대형이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조성되었으며 무덤 방향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널길과 좌우 곁방〔耳室〕이 있는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파괴가 심하여 천장구조는 알 수 없다. 회벽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널방 동벽의 밑 부분에 넓은 장식띠를 돌리고 그 위에 청룡을 그린 흔적이 남았을 뿐이었다. 좌우 곁방을 지닌 앞방 과 정방형 널방, 벽화 제재상의 무게 중심이 생활풍속에서 사신으로 과도기임을 보여주는 벽화구성 등을 감안하면 고산동9호분의 축조는 5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듯하다.

고산동10호분 흙무지의 외형은 방대형이며 무덤의 방향은 서쪽으로 23° 치우친 남향이다. 널길과 동서 감이 있는 긴네모모양의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으로 고산동7호분과 무덤방향, 평면구조에서 거의 같으나 파괴의 정도가 심하다. 앞방 좌우의 곁방은 배집천장이며, 앞방과 널방 천장은 파괴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없다. 회벽 위에 그림을 그렸으나 회벽이 심하게 떨어져 널방 남벽 동쪽벽의 기와집과 춤추는 인물들 정도만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두 개의 감을 지닌 앞방과 바른네모모양〔正方形〕널방, 생활풍속 위주의 벽화구성 등으로 보아 고산동10호분의 축조는 5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듯하다.

고산동15호분은 무덤칸의 파괴 정도가 심하여 구조와 축조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무덤칸에서 수습된 회벽조각에 새와 현무(玄武) 그림의 일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칸 안에 회를 칠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는 생활풍속과 사신을 주제로 구성되었거나 단일 주제로서의 사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남은 상태, 벽화 내용 등으로 보아 고산동15호분의 축조는 5세기 후반이나 이 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듯하다.

고산동20호분의 무덤방향은 남향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널길은 널방 남벽의 동쪽에 치우쳐 설치되었다. 무덤칸은 반지하에 축조되었고 무덤칸 바닥은 2㎝ 두께로 숯을 덮고 다시 4.5㎝ 두께로 회를 발라 마무리하였다. 무덤칸 천장부는 무너지고 벽체의 상당 부분도 파괴된 상태로 발견, 조사되었다. 널방 안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나 회벽이 떨어지면서 벽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 적어졌다. 널방 벽 모서리에는 붉은 색으로 22㎝ 두께의 목조가옥 기둥을 그렸지만 서북 모서리의 것만 형태가 잘 남아 있다. 남은 벽화의 흔적으로 볼 때 고산동20호분의 벽화 주제는 생활풍속일 가능성이 높다. 무덤의 구조, 벽화 내용으로 보아 고산동20호분의 축조는 5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듯하다.

의의와 평가

고산동고분군은 주요한 고분의 구조와 벽화 내용을 통해서 볼 때,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초에 걸친 평양지역 벽화고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전문사전-고분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고구려고분벽화의 세계』(전호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고구려고분벽화연구』(전호태, 사계절, 2000)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고고학 및 민속학강좌,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
「대성산성무덤떼」(채희국,『유적발굴보고』9집-대성산일대의 고구려유적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집필자
전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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