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유공열, 이선유, 장선오, 한성준, 강소향 등과 송만갑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협률사를 조직,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다. 1910년 8월 해산하였다.
판소리를 중심으로 전통 예술의 지방 순회 공연을 위해 설립하였다.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지는 협률사가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고, 예술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이미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수용, 점차 개방 되어 갔고, 연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이에 1908년을 전후하여 원각사(圓覺社)를 비롯하여 광무대(光武臺) · 단성사(團成社) 등의 연극 전용 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생겨났다.
송만갑은 1907년서울 동대문 안에 신축 개관한 광무대에서 이동백․ 유공열․ 한성준․ 허금파․ 강소향 등과 출연하였다. 일 년 남짓 창극을 이끌던 송만갑은 그의 문도 중에서 장판개․ 김정문․ 김광수 같은 창자들이 배출되자, 1908년 가을 이동백․ 김창룡․ 유공열․ 이선유․ 장선오․ 한성준․ 강소향 등과 자신의 문도들을 중심으로 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다.
송만갑협률사는 주로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8월 통영에서 공연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그날로 해산하였다.
송만갑협률사는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판소리 및 전통 연희를 순회 공연 하였다. 전통 연희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지방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창극인데다가, 대명창급의 얼굴 한번 보고 듣기가 소원이었던 만큼, 송만갑협률사가 당도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려들어, 가설극장은 언제나 초만원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지방관장이나 유지들의 사사놀음에도 응하였다.
1906년 일제에 의해 원각사가 폐지된 이후 주춤하였던 전통 연희 공연을 활성화시켰고, 판소리 ․ 창극 등 전통 연희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