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 출신. 7세 무렵부터 판소리와 남도잡가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936년 서울로 상경한 뒤에 송만갑 등에게 소리 공부를 하며 창극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1960년대부터 판소리 고수로 활동하였고,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영수(金永洙)는 1917년 7월 17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진도 설북의 명인 김행언의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에는 신청이 있어서, 노래와 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그의 부친은 풍물에서 으뜸가는 북잽이었고, 소리북도 곧잘 쳤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따라 김영수는 7세 무렵부터 진도 출신 최두인(崔斗仁)에게 판소리와 남도잡가를 배웠고, 13세 때에는 목포에서 판소리 명창 오수암(吳壽岩)으로부터 귀동냥으로 소리 공부를 했다. 그 뒤 영광군 법성포의 명월관에서 3년간 기생들의 소리 선생으로 있었고, 부산 ․ 경주 ․ 울산 등에서도 소리 선생을 지냈다. 가야금의 명인 박상근의 권유로 1936년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 송만갑 등 대명창들에게 소리 공부를 하였고, 이후 여러 창극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판소리 고수로 활동하였고,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나이 28세인 1944년 혼인하여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고, 장녀를 제외한 세 자녀가 모두 국악 작곡 · 아쟁 · 가야금 등의 분야에서 예인의 길을 걷고 있다.
김영수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1936년 서울 상경과 함께 시작된다.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면서 송만갑에게 「흥보가」․「심청가」․「춘향가」를 재수하였고, 김세준에게 「수궁가」를 이어 받았으며, 조선성악연구회 소속으로 창극 공연에 참여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가 해산된 뒤에는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 공연에 참가하였고, 광복 후에는 아성창극단 · 김연수창극단(金演洙唱劇團)에 함께 하였다. 1956년에는 예원국극단을 창단․운영하였으며, 1960년대 국립창극단이 창설된 뒤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1964년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악장, 1970년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1980년대에는 국립국악원 자문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송만갑 ․ 오수암 ․ 박동준 ․ 이동백 등 여러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워 처음에는 판소리 창자로서 활동하며 창극 공연에도 적극 참여하였지만, 중년에 목을 상한 이후 1960년대부터 판소리 고수로 활동하였다. 김영수는 소리를 배울 무렵 한성준 ․ 정원섭 ․ 김재선과 같은 북의 대가들에게 북도 함께 배웠으며, 소리로 활동할 당시에도 고수의 역할을 많이 담당하였으므로, 소리와 북 모두에 능할 수 있었다.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보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