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본관은 창령(昌寧).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수료하고,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와 아악사를 거쳐, 국립국악원 악사장,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거문고연주자와 교육자로서 국악 발전과 계승에 공헌하였다.
성경린은 서울 출생으로, 1911년 11월 9일(음 9월 18일) 아버지 성한영과 어머니 이혜숙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극빈하였다. 만9세인 1920년승동기독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가를 꿈꿨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외가 어른의 소개로 1926년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시험에 응시하여 제3기생으로 입소, 1931년 수료와 함께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로 활동하였고, 이후 평생 국악인의 길을 걸었다. 1935년 25세에 혼인하여 슬하에 3남 4녀의 자녀를 두었고, 2008년 3월 5일 9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성경린은 1926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제3기생으로 입소하면서 궁중음악과의 인연을 시작하였다. 이후 80여 년간 거문고 연주자 ․ 국악 교육자 ․ 이론가로서 한국 궁중음악 보존에 힘썼다.
1931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수료하고,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를 거쳐 1941년 아악사로 승진하였다. 1948년에는 이혜구(李惠求) · 장사훈(張師勛)과 함께 국악학회(國樂學會)를 발족하여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의 모체를 이루었으며, 1949년 서울시 문화위원에 위촉되었다. 1950년에는 국립국악원 악사장이 되었고, 1954년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1∼1972년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했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지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 무형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72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후신인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73년 가곡보존회 이사장, 1977년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1982년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 부위원장 겸 제2분과 위원장,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1985년과 1993년 문화재위원회 제4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부터 2008년 별세하기까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으로 재직하였다.
홍조소성훈장(1962)|대한민국 문화포장(1963)|국민훈장 모란장(1972)|은관문화훈장(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