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흥사 대광전에는 건물 외부 포벽과 측벽에 모두 17폭, 내부 좌우측 벽 및 포벽, 후불벽 등에 57폭 등 내외에 총 80여 점의 벽화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내부의 동벽에는 약사삼존도와 팔부중, 서벽에는 아미타삼존도와 6대보살도 및 팔부중, 좌우 포벽에 팔상도 등이 있으며, 후불벽 뒷면에는 삼관음보살도(三觀音菩薩圖)가 그려져 있다. 이들 벽화 가운데 내부 동측면의 약사삼존도와 팔부중, 내부 서측면의 아미타삼존도와 6대보살도, 사천왕도, 신중도 등은 대광전 건립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의 벽화들은 1801년 대광전을 중수할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광전 후불벽에는 벽화는 남아있지 않고 대신 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나 좌우에 약사삼존도 벽화와 아미타팔대보살도 벽화가 배치된 것으로 보아 조성 당시에는 영산회상도 벽화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삼세불 도상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측면 벽의 중앙은 3단으로 구성되어, 상단에 아미타삼존, 중단에는 6대보살, 하단에는 사천왕을 배치했다. 서측벽 중앙칸 상단은 상방이 가로질러 토벽이 상하로 나뉘고 다시 2개의 벽선으로 나뉘어, 모두 6쪽의 흙벽과 상방 표면에 걸쳐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칸 중단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는 그 아래 함께 그려진 6보살도와 함께 아미타팔대보살도를 이루고 있다. 상단 중앙의 아미타불은 좌우 협시보살인 관음보살, 세지보살과 함께 그려졌다.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은 신체에 비해서 머리가 작고 육계가 불분명하며 중앙계주가 크게 묘사되었다. 계란형의 얼굴은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입이 작다. 신체는 비대하며 건강한 편인데 사각형적인 신체에 직각에 가까운 어깨, 평판적인 가슴, 폭이 좁은 무릎 등 전체적으로 방형의 느낌이 강하다.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결하였다. 대의는 통견(通肩)을 걸쳤는데 옷깃에만 무늬가 표현되었다.
좌측의 관음보살은 왼쪽 다리를 내린 유희좌로 앉아 머리에서부터 아래까지 백의를 걸쳤으며, 보관에는 아미타화불이 표현되어 관음보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얼굴은 풍만한 편으로 눈이 치켜 올라갔으며 입이 작은 것이 본존과 비슷하다. 우측의 세지보살 역시 둥글고 풍만한 얼굴 등이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으로, 화려하고 복잡한 보관을 쓰고 있으나 보관에 정병은 분명치 않다. 얼굴에 비해 장대한 체구는 본존과 닮았으며, 가슴과 팔에는 영락장식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아미타삼존 아래에는 6구의 보살이 입상으로 나란히 그려져 있다. 6보살의 가슴 높이에 중방이 가로 지르고 벽선으로 나뉘어 6쪽의 토벽과 수장재 표면에 걸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들 여섯 보살은 아미타삼존도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팔대보살을 이루었는데, 아미타불의 좌우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6보살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금강장보살, 제장애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각각 탑과 여의(如意)같은 지물을 들거나 천의자락을 잡고 있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제외하고는 특징적인 지물이 표현되지 않아 존명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보통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 금강장보살과 제장애보살 등이 서로 상대하여 표현되는 것으로 볼 때 향우측에서부터 금강장보살, 지장보살(두건),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여의), 제장애보살(그릇)로 추정된다. 이들 역시 신체에 비해 얼굴이 작으며, 보관의 장식이 정교하고 수식이 풍부하게 표현되었다.
6대 보살 아래로는 사천왕이 배치되었다. 사천왕은 중인방 밑에 2개의 벽선을 세워 3쪽의 토벽과 벽선 위에 그려졌다. 그러나 우기에 빗물과 습기로 인해 박락과 손상이 심하며 사람들의 손길이 쉽게 닿는 곳이어서인지 신장의 얼굴은 고의적으로 지워졌거나 훼손된 곳이 많으며 보채도 가해졌다. 3칸으로 벽을 나누어 중앙에는 2구, 좌우에 각 1구씩의 천왕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은 보통 동북 천왕, 서남 천왕이 짝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 점을 볼 때, 용을 든 천왕이 동방 지국천, 칼을 든 천왕이 북방 다문천, 화살을 든 천왕이 남방 증장천, 비파를 든 천왕이 서방 광목천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사천왕상들과 지물이 달라 존명은 확실하지 않다. 천왕은 모두 장대한 신체에 갑옷을 입고 있으며 신장으로서의 위엄과 당당한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한편 중앙칸 벽화의 향우측 벽에는 팔부중 가운데 4구가 그려져 있다.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구반다가 배치되었으며 그 아래로 상왕(象王)이라고 적힌 코끼리 모습의 신장과 홀을 든 천, 어금니가 날카롭게 튀어나온 모습의 마후라가가 그려졌다. 이와 상대하는 반대편 동벽에도 나머지 4구의 신장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팔부중 가운데 1구만 남아있다.
중앙칸에는 약사삼존도가 그려져 있다. 약사불은 다양한 색대(色帶)로 장식된 광배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하였는데 머리에는 육계가 뾰족하며 머리 중앙에 계주가 표현되었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신체는 어깨가 직선적이며 사각형적이어서 아주 장대해 보인다. 통견으로 붉은 대의를 걸쳤으며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배에 대어 약그릇을 든 약기인(藥器印)을 취하였다. 왼쪽에는 일광보살, 오른쪽에는 월광보살이 협시하였는데 각각 보관에는 붉은 해와 흰 달을 표현하였으며 일광보살은 연꽃 줄기, 월광보살은 여의를 들었다. 풍만한 얼굴에 장대한 체구가 서측벽면의 아미타삼존도와 유사하다.
약사삼존도 아래에는 인사자왕(人獅子王)이라고 쓴 입상의 신장이 1구 배치되어 있다. 하체부분의 탈락이 심하지만 붉은 머리칼이 위로 뻗쳐올라간 모습과 작은 얼굴에 치켜 올라간 눈, 팔자의 붉은 입 등에서 험상궂은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 옆에 흰 달의 모습이 보이고 앙발(仰髮)의 머리를 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아수라상일 가능성이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어 확신하기는 어렵다.
신흥사는 원효대사가 처음 개창했다고 전하지만 사적기라든가 관련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88년 대광전 해체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암막새 기와에 ‘순치십년사월(順治十年四月)’이라고 쓴 명문이 발견되어 1653년에 대광전에 사용할 기와를 제작한 사실이 밝혀졌고, 해체보수 때 종도리 뱃바닥에서 발견된 묵서된 상량기에 ‘순치 십사년 정유년 사월 십칠일 상량(順治 十四年 丁酉年 四月 十七日 上樑)’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1657년에 현재의 대광전이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신흥사 대광전의 벽화는 인물에 보이는 형태적 특징, 예를 들어 풍만한 얼굴과 큼직한 나발의 표현, 치켜 올라간 눈과 작은 입, 방형의 건장한 신체표현 등에서 1687년 쌍계사 영산회상도를 비롯하여 1649년 보살사 영사회상괘불도, 1653년 화엄사 영산회상괘불도 등 17세기 중반경의 불화와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17세기에 대광전이 중수될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측면 벽에 아미타팔대보살도와 사천왕 및 팔부중을 배치하고 동측면 벽에는 약사삼존도와 팔부중을 배치하였으며,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후불벽에는 석가모니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구도는 중앙에 석가모니불화를 배치하고 향우측에 약사여래도, 향좌측에 아미타여래도를 배치하는 삼세불화의 구성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시대 벽화로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삼세불벽화로서 중요성이 매우 크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조선 후기의 벽화 가운데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자 다양한 도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