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28년 선찰(善察)의 발원에 의해 쾌민(快旻)을 비롯한 체원(體還), 체준(體俊), 굉원(宏遠), 법징(法澄), 새정(璽淨), 지성(智性) 등 7명의 화승이 제작한 지장시왕도로서, 동화사를 비롯하여 경상남·북도 지역 25개 사찰의 승려 80여 명과 신도 40여 명의 시주에 의해 조성되었다. 가로 228㎝, 세로 187.7㎝의 대형 화폭에 본존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자, 옥졸, 6보살 등 총 35명에 이르는 명부의 권속을 배치하였다. 화면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이중륜광(二重輪光)을 배경으로 수미단 위 연화좌에 결가부좌하였으며, 수미단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시립하였으며 이들 지장보살삼존이 이루는 정삼각형의 빗변을 따라 그외 권속들이 사선으로 배열되었고, 화면 상단 좌우로는 6보살이 표현되었다.
본존 지장보살은 승형(僧形)으로,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왼손에는 긴 육환장(六環杖)을 비스듬히 들고 있다. 얼굴은 귀공자 타입의 원만상으로 다소 살이 찐 편인데, 활모양의 눈썹과 가늘고 긴 눈, 아담한 코, 작은 입술 등 이목구비가 가는 필선으로 묘사되었다. 이마 가운데에는 팔(八)자형 머리카락이 그려져 있고, 입술의 아래 위, 턱에도 형식화된 수염이 표현되었다.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약간 큰 듯 하지만 적당히 넓은 어깨와 넓은 무릎 폭의 안정된 결가부좌 자세로 인해 신체는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정사각형에 가까운 건장한 체구를 보여준다. 목에는 가늘게 삼도(三道)가 표현되었으나 아래쪽으로 쳐져서 마치 목걸이를 한 듯하며, 넓게 트인 가슴에는 화려한 영락을 착용하였다. 착의법은 안에 군의(裙衣)를 입고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쳤는데, 가사 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고 있는 모습은 부처의 착의법과 동일하다. 조의가사(條衣袈裟)에는 흰색의 작은 화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가사 단에는 활짝 핀 꽃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문양은 고려불화에 유행하던 것으로 조선 후기까지 전통적 요소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지장보살의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모두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해 시립하였다. 도명존자는 지장보살과 같은 조의가사를 걸쳤으며, 무독귀왕은 문관 차림에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있다. 이들 옆으로는 시왕이 각각 5명씩 합장 또는 홀(笏)을 쥐고 시립하였는데, 지장보살의 왼쪽에 있는 염라대왕만이 일월관(日月冠)을 쓰고 있어 10왕의 대표로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시왕 옆에는 사자(使者)가 각각 1구씩 배열되었고, 지장보살의 옆에도 2구의 지옥사자가 배열되었다. 사자들은 양각(兩角)이 높게 솟은 관을 쓰고 두루마리와 번(幡)을 들거나 합장하고 서있다. 이것는 『예수시왕생칠경(預修十王生七經)』에서 사람이 죽으면 사자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검은 번을 들고 죽은 자의 집에 찾아가 데리고 온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사자들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는 망자의 죄상을 적은 명부임을 알 수 있다. 4명의 사자 중 화면 하단 좌우에 그려진 2명은 북지장사 지장시왕도(1725년)에서처럼 머리와 옷자락을 휘날리며 화면 속으로 막 들어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형상의 사자는 고려시대 지장시왕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받쳐 든 모습인데 반하여 조선시대에는 1726년 실상사 지장시왕도, 1732년 한천사 지장보살도에도 보듯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막 뛰어온 듯한 모습을 취하였다. 이들 위로는 판관과 지옥장군 및 선악동녀, 옥졸을 비롯하여 6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6보살은 좌우 3구씩으로, 모두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지장보살과 같은 영락을 걸쳤다. 6보살은 지장보살이 육도(천, 인,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능화(能化)의 보살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육광보살(六光菩薩)이라고도 하며, 육도중생의 고뇌를 구원하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상비보살(常悲菩薩),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관음보살(觀音菩薩),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 지장보살(持藏菩薩)의 여섯 보살을 말한다. 6보살이 나타나는 조선후기의 지장보살도는 북지장사 지장보살도(1725년, 국립중앙박물관소장)가 가장 이른데, 이 불화를 그린 석민(碩敏)이 동화사 지장보살도의 시주로 참여하고 있고 두 불화의 도상이 거의 유사한 것을 볼 때 쾌민 등이 동화사 지장시왕도를 제작할 때 3년 전에 조성된 인근 북지장사 지장시왕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색채와 함께 숙달된 필선을 구사하였다. 채색은 밝은 홍색과 녹색이 주를 이루며 홍색과 녹색 모두 밝고 차분한 색조를 쓰고 있어 옹정연간(擁正年間) 특유의 색채감각을 느끼게 한다. 필선은 세련되고 섬세하며, 특히 인물들의 수염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낸 것에서 화승들의 필력이 숙달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지옥사자의 의습에서는 일부 형식화된 면도 엿보인다.
한편 이 불화의 제작에는 수화승 의균(義均)이 본사시주 및 화주로, 화승 석민이 본사시주로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의균은 18세기 전반 동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화사 아미타불도(1699년), 동화사 아미타후불도(1703년, 국립중앙박물관)를 제작하였으며, 석민과 함께 파계사 원통전 석가모니후불도(1707년), 포항 보경사 괘불도(1708년), 북지장사 지장시왕도(1725년)를 조성하였다. 의균 화풍의 특징은 균형잡힌 신체표현과 담채색의 은은한 색채, 철선묘의 안정감있는 필선 등으로, 이후 인근의 경상북도 사찰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동화사 지장시왕도 역시 양식과 도상면에서 의균이 조성한 파계사 석가모니후불도 및 영천 법화사 석가모니불도(1724년), 북지장사 지장시왕도(1725년)와 친연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 불화의 수화승인 쾌민과 체준이 의균과 함께 영천 법화사 대웅전 석가모니불도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체환은 파계사 원통전 석가모니불도, 포항 보경사 괘불도를 함께 제작하였고, 굉원은 석민과 함께 북지장사 지장보살도를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동화사 지장시왕도는 1728년 경상남·북도 지역의 25개 사찰의 승려와 신도들이 함께 발원·시주한 작품으로, 18세기 중엽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화승 쾌민이 6명의 화승들과 함께 제작하였다. 구도에서는 지장보살과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녀, 옥졸, 6보살 등 35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표현하면서도 중앙의 본존에 비하여 권속들을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하므로써 많은 권속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하였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형태에 안정감이 있고 신체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안정된 색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동화사의 대화승인 의균이 화주가 되고 그 제자들이 제작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17세기말∼18세기 전반 의균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지역 불화 화풍을 잘 보여준다. 조성연대가 확실하며, 참여한 화승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며, 18세기 초 지장시왕도의 양상 및 경북 내륙 화사들의 화풍상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