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충주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제1사단 제13연대 9중대장이었다. 1955년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본부 기획참모부 기획과장 등을 역임하고, 1959년 육군 제1군사령부 작전과장으로 부임했다.
5·16군사정변 당시 같은 육군사관학교 8기인 김종필에게 포섭되어 참가했다. 이한림은 회고록에서 “이종근과 같은 제1야전군 사령부 과장급 간부들이 군사정변에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진압을 포기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군사정변이 성공한 뒤 육군대학에 제10기 단기과정으로 입교하여, 1962년 6월 23일 수료하였다.
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결정하면서 이종근은 정계에 투신하였다. 1963년 1월 12일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1월 18일 열린 민주공화당 발기선언에 참여하여 78명의 창당발기인 중 1인이 되었다. 이후 공화당의 충주‧중원 지역구 위원장을 맡았다.
1965년의 한일회담 정국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정부의 입장을 선전하였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하였다. 1971년 총선에서 낙선했으나 1973년 총선에서 당선되었다. 1980년 12월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81년 총선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였다.
낙선 이후 충주에 칩거하다가 1987년 김종필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충주·제천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고, 3당합당으로 민자당에 참여하였다. 1995년 2월 20일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민자당을 탈당한 뒤, 2월 22일 자민련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96년 총선에는 충주에 출마하지 않고, 고문자격으로 자민련이 공천한 김선길(金善吉)을 지원하였다. 2003년 10월 22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대전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