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년(선조 37)~1637(인조 15). 본관은 부평(富平)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 전사하였다. 시조 이희목(李希穆)의 19세손으로, 대대로 인천 일대에서 세거하였다. 부인은 금천 강씨이다.
이윤생은 궁술(弓術)과 마술(馬術)이 뛰어났다고 전하며 이로 인해 충무위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원도(猿島, 낙섬이라고도 함)에서 들어가 활동하였다.
원도에서 활동하던 이윤생이 주도한 의병은 청국 군사에 맞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강화도가 함락된 직후인 1637년(인조 15) 1월 대규모 청국 군사와 대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전사 당시 나이가 34살이었다. 이윤생의 전사 소식을 접한 부인 강씨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의절하였다.
후손 이주연(李周淵)이 묘비명을 찬술하였다. 영조대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부인과 함께 효자로 등재되었다. 1861년(철종 12)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면서 부인과 함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현재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 442번지에 소재한 이윤생강씨정려비는 1990년 11월 9일에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