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6년(명종 11)~1614년(광해군 6). 자는 여술(汝述)이고, 호는 영호(瀯湖)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경상도 거창의 영상(瀯上)에서 세거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개령현감(開寧縣監) 등 지방관으로 나아가서는 민폐 해소에 주력하였다.
증조부는 사간을 지낸 윤경(尹耕)이고, 조부는 회령판관을 지낸 윤삼빙(尹三聘)이며, 아버지는 윤은신(尹殷臣)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효원(李孝元)의 딸로 효령대군의 현손녀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 이몽룡(李夢龍)의 딸로, 완원군(完原君)의 증손녀이다. 12살 때 문산두(文山斗)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문산두는 윤경남이 평생 교유한 문위(文緯)의 아버지이다. 경사(經史)에 침잠(沈潛)하는 한편 문위를 비롯해 정온(鄭蘊) · 곽준(郭䞭) · 유중룡(柳仲龍) 등과 교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김면(金沔)의 참모로 의병 활동을 하였고, 김성일(金誠一)의 추천으로 군기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세자익위사 익찬과 사헌부 감찰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장수현감에 제수되면서 취직하여 민폐를 일소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608년(선조 41) 광흥창 주부를 비롯해 1609년(광해군 즉위) 개령현감, 1612년(광해군 4) 운봉현감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위와 함께 산척(山尺) 등을 모집하였고, 이어 전 좌랑 김면이 기의(起義)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하였다. 고령에서 왜구와 교전을 통해 80여 급(級)을 참수하고 선박 2척을 포획하여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에게 보냈다. 이어 사두관동(沙豆館洞)의 사암(沙巖)과 단성 벽계진(碧溪津)에서 왜구와 교전해서 다수의 왜구를 참수하거나 포획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김면의 사후에는 그에 대한 만장(挽章)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개령현감에 제수되어서는 「민막소(民瘼疏)」를 올려 민폐 시정에 노력하였다.
1893년(고종 30)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에 증직되었고, 1897년(광무 1)에는 10대손인 윤주하(尹冑夏)의 주도하에 「민막소」를 비롯한 그의 저술과 기타 기록에서 그의 활동 내용을 초출하여 『영호실기(瀯湖實記)』를 간행하였다. 『영호실기』의 서문은 장복추(張福樞, 18151900)가 짓고, 발문은 허유(許愈, 18331904)가 찬술하였다.
경상남도 거창박물관에 소장된 상아홀(象牙笏)이나 팔각전통(八角箭筒) 등이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같은 날에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 소재한 그의 생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