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에 생활하다가 1627년(인조 5) 변란을 도모하였으며,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명종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광해군대에 서울에서 횡성으로 이사한 뒤에 스스로 경작을 통해 자급하는 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1624년(인조 4) 2월에는 국정 운영과 관련된 10여 개 조항을 상소하였는데, 이로 인해 같은 해 4월에는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직후에 조정에서 후금과 화친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거는 변란 이전 충청도 제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유희분(柳希奮)의 조카 유효립(柳孝立) 등 대북(大北) 잔여 세력들과 교류하며 광해군의 복립을 도모하였다.
1627년(인조 5) 10월에 횡성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이 이인거가 변란을 도모했음을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에 따르면, 이인거는 같은 해 9월 27일 강원감사에게 자신이 의병을 일으켜 후금과 화친을 주도한 인물을 처단하고 오랑캐를 토벌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9일 군사를 모은 뒤에 횡성현에 보관된 군기를 탈취하고는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예방 차원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에 은밀하게 하유하는 한편, 신경인(申景禋)을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양주(楊州)로 가게 하였다. 또한 승전색과 선전관을 파견해 이인거 집안의 문서를 수색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0월 1일 이인거와 3부자, 그리고 군인 17명을 붙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10월 5일 체포된 이인거 등에 대한 공초가 진행되어 관련자들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변란의 토벌에 공을 세운 홍보(洪寶) 등은 소무공신(昭武功臣)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