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보유적 제165호제168호. 원산리에서는 1989년 6월부터 1990년 7월까지 약 4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총 3기의 청자 가마 유구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모두 4기가 확인되었으나 1호는 도기 가마이며, 2호부터 4호까지만 청자를 굽던 가마이다. 가마들은 원산리 6작업반의 배천봉천간 큰 도로 좌측의 홍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의 종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도기와 청자 가마가 함께 확인되어 도기를 굽던 단계에서 청자 제작 기술을 새롭게 수용하여 청자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에 이 지역은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배천군 원산리로 변경되었다.
1호 가마터는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동남쪽에서 서북 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2호 가마터는 1호 가마터에서 동북쪽으로 약 3m 떨어져서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다. 3호 가마터는 능선의 동쪽 경사면에 동북쪽에서 서남방향으로 2호 가마터에서 약 23m 떨어져 있고, 4호 가마터는 능선의 동쪽에서 동북쪽으로 남서방향으로 3호 가마터에서 약 28m 떨어져 있다.
3기의 청자 가마는 모두 벽돌로 제작된 벽돌가마이면서, 단실(單室) 구조의 등요(登窯)이다. 고려청자 가마에서 벽돌이 사용된 전축요(塼築窯)는 고려 초기에만 보이다가 흙가마인 토축요로 변화한다. 고려 초기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월주(越州) 지역으로부터 청자 제작 기술을 수용할 때에는 중국식의 전축요를 지었지만 이후에 고려의 상황에 맞게 발전하면서 토축요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벽돌가마는 원산리 청자가마와 함께 시흥 방산동 가마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외에도 용인 서리 가마터에서는 토축요의 아래 층위에서 전축요가 확인되어, 전축요에서 토축요로 변화하였음이 확인된 유적이다.
원산리 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2호 가마는 아궁이, 번조실, 굴뚝부까지 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길이가 40m에 달하는 대형의 벽돌가마이다. 특히, 가마가 운영되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수리·보수되는 과정에서 가마의 길이와 폭이 줄어든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2호 가마의 4차 개축된 가마에서는 명문이 음각된 제기들이 다량 발견되어, 제작 시기와 사용 장소 등이 밝혀지면서 고려 초기 청자의 제작 상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제기의 명문을 통해 순화삼년(淳化三年, 992)과 순화사년(淳化四年, 993)에 제작되어 태묘(太廟)에서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확인되었다. 명문 내용에 언급된 제기를 제작한 도공들이 중국에서 도래한 월주요계 장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원산리 청자가마터는 발굴 이후에 보호각이 설치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가마터는 유구가 잘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명문청자 제기들이 출토되면서 고려 초기에 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하는 상황을 알려주는, 학술적 가치를 가진 유적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고고학계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주요 성과로 인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