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재료와 표현기법에서 전통방식을 벗어나 근대 한국화의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한 독보적인 존재이다. 허건은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이 작품이 특선을 하여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개항장 목포 화단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화면의 근경에는 목련이 핀 초가집 마당에 헛간과 소, 흰 닭들이 보이고, 아기를 업은 채 머리에 광주리를 얹은 하얀 한복차림의 여성이 싸리문을 들어서는 농가의 평범한 일상이 표현되어 있다. 그 뒤로는 유달산 근처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보리밭 언덕이 펼쳐져 있는데, 커다란 면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은 인상주의의 면분할법을 연상시키며 조밀한 경물로 이루어진 근경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재료도 수묵채색이 아니라 황토 알갱이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하나하나 채색을 올린 토점화로 보리밭의 생명력을 극대화시킨 것은 이례적이다.
토점화는 1940년 일본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입학한 허건의 동생 허림(許林)이 황토계 안료와 호분으로 질감을 강조했던 일본 화가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와 제자들의 창작활동에서 영감을 얻어 독자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허림은 1942년 「과수원 풍경」(개인소장)에서 최초로 토점화법을 시도하였으나 미완에 머물렀으며, 같은 해 제5회 신문전(新文展)에 입선한 「6월 무렵(六月の頃)」(남농기념관)에서는 보리 이삭을 황토로 한알 한알 표현하고 채색하여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허림의 이러한 독창적 화법은 허건에게 영향을 미쳐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목포교외」(국립현대미술관)의 일부 경물에서 토점화법이 시도되었다. 이어 허건은 1943년 제6회 신문전에 입선한 「운문암(雲門庵)」(개인소장)과 같은 해 완성된 「맥구(麥丘)」(개인소장)를 토점화로 제작하였다. 1944년에 제작한 「목포일우」는 1942년 미완의 상태로 남겨둔 허림의 「과수원 풍경」을 기초로 다시 제작한 것이며, 재료와 표현기법 등에서 근대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선구자적 작례로서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해방 이후 허건은 일본색 탈피가 화두로 등장하자 토점화법을 외면한 채 전통 남종화법으로 급선회하였다. 하지만 1940년대 전반 허건과 허림 형제가 토점화법으로 완성한 일련의 작품들은 근대 한국 화단에서 재료와 표현기법에서의 독창적인 실험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새롭게 조명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