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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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품
김인승(金仁承)이 1942년에 그린 그림.
이칭
이칭
춘조(春調),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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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김인승(金仁承)이 1942년에 그린 그림.
개설

캔버스에 유채. 세로 147.2㎝, 가로 207㎝. 한국은행 소장.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한 대작이다. 이 작품은 두 폭의 대형 캔버스에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장면과 한복차림의 여인들이 그 음에 매료된 듯 감상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내용

김인승은 1936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재학 시절 「나부(裸婦)」로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1937년 봄 27세의 나이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기까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두 작품 이상을 출품하였다.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나부」(특선), 「화실(畵室)」, 「흑의의 여인(黑衣女)」 3점을 출품하였으며 1938년 「나부」(특선), 「습작」, 1939년 「문학소녀」(무감사 특선), 「황의(黃衣)」, 1940년 「춘의(春衣)」(무감사 특선), 「고창(古窓)」을 출품하여 연속 4회 특선하였고 1940년부터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김인승은 개성 본가에 아틀리에를 두고 경성을 오가며 조선미술원에서 김복진(金復鎭), 김은호(金殷鎬) 등과 함께 미술교육을 맡고 있었다.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봄의 가락」은 추천작가가 된 김인승이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제작한 대표작이다.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대작(大作) 출품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이 해의 대표적인 대작으로 두 폭의 대형 캔버스에 인물군상을 그린 것이다. 출품 당시에 두 폭은 따로 출품되었다. 두 폭 중 오른쪽은 첼리스트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광경이고 왼쪽은 7명의 한복차림 여인들이 그 음에 매료된 듯 감상하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 화면에는 첼리스트 외에 각 2명의 남자와 여인이 서거나 앉아서 시선을 악보와 첼리스트에게 두고 있다. 첼리스트의 연주를 바라보는 뒤쪽의 남성도 첼로를 옆구리에 끼고 있어 연주자로서의 남성, 감상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역할이 설정되어 있다. 여성들의 복식은 개량된 한복 패션으로 저고리 길이가 양복의 상의처럼 길어지고 치마 길이가 짧아진 당시 신여성의 전형적인 복식이며 남성들은 양복을 입고 있어 1930년대 이후 모던보이와 모던 걸의 음악회임을 암시하고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세로로 ‘一九四二年 金仁承(1942년 김인승)’이라는 사인이 있다.

이 작품은 고전적 화면의 구성방식을 따랐다. 두 폭 화면의 뒷쪽은 수평으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화면의 안정감을 부여하는 한편, 전면의 인물은 대각선의 원근법적 공간에 배치되어 화면의 깊이와 공간감을 부여한다. 왼쪽 전면에 앉아 있는 여인의 슬리퍼 방향과 오른쪽 악보대 다리 방향의 대각선도 화면 중앙 뒷쪽으로 시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의 시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를 채용하여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 인물들의 다양한 포즈들이 감상자들에게 보여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인물들의 시선을 모두 오른쪽의 첼리스트에게 집중시키되 보다 밝은 빛과 다양한 색채로 왼쪽의 인물들을 처리하여 전체적으로 양폭의 화면이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 작품에 대해 윤희순(尹喜淳)은 “금년의 대작(大作)으로는 김인승씨 「춘조」인데 화포의 효과를 살린 점, 역시 씨는 재기(才氣)의 사람이다. 렘브란트 광선은 근래 사진술과 영화술에도 많이 이용된다. 이러한 수법이 속취(俗臭)를 내게 한 원인이리라. 동일한 모델의 반복으로 –성격을 무시한– 사람의 확대로 군상을 취급한다는 것은 화실에서 흔히 있는 수법이겠으나 현대인은 이것에 기쁨(愉悅)을 느낄 만큼 단순치는 않다”. (「미술의 시대색」, 『매일신보』, 1942.6.13)라고 평을 하였다. 이 평에서 볼 수 있듯이 화면의 뒤쪽 측면에 광선방향을 두는 렘브란트 광선으로 명암처리를 하는 방식과 인물들의 개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한 모델을 두고 여러 포즈로 데생을 하듯 객관적 묘사에 치중한 인물처리방식은 이 시기부터 지속된 김인승의 특징이다.

1940년대 초반은 일제 전시총동원체제시기로, 김인승은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 1942), 단광회(丹光會)(1943), 결전미술전(決戰美術展) 심사위원(1943)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가 개설된 이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국전 아카데미즘 화풍 정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아름다운 그림들과 한국은행』(국립현대미술관, 2000)
『김인승화집』(동아일보사, 1987)
「김인승의 인간과 작품세계」(이경성, 『김인승화집』, 동아일보사, 1987)
「미술의 시대색」, (윤희순,『매일신보』, 194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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