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어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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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어진/김은호
순종어진/김은호
회화
작품
1923년에 김은호가 제작한 순종의 초상화 초본.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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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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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순종 어진은 1923년에 김은호가 제작한 순종의 초상화 초본이다. 순종은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김은호는 근대기 채색화단의 대표적 화가이다. 어진 제작방식은 먼저 버드나무 숯으로 윤곽을 그린 후 기름종이에 먹선으로 초본을 만든다. 이것이 유지초본인데 이 단계에서 어진이 적합하다고 판명이 되면 계속 그려가게 된다. 이 작품은 순종어진 유지초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지초본은 국립현대미술관본과 고려대학교박물관본 두 점이다. 이 작품은 사진을 보고 윤곽과 음영을 파악하여 그리는 사진영상식 수법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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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3년에 김은호가 제작한 순종의 초상화 초본.
개설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의 초상화 초본이다.

김은호(金殷鎬)는 근대기 채색화단의 대표적 화가로, 고종(高宗)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마지막 어진화사(御眞畵師)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어진 제작방식은 먼저 버드나무 숯으로 윤곽을 그린 후[유탄약사(柳炭略寫)], 기름 종이에 생강즙을 먹인 뒤[강즙포수(薑汁布水)] 그 위에 먹선으로 초본을 만든다. 이것을 유지초본(油紙草本)이라 하는데 유지초본 단계의 어진을 봉심(奉審)하여 적합하다고 판명이 되면 그 위에 투명한 회견(絹繪) 쟁틀을 밀착시켜 그려가는 3단계를 거친다. 이 작품은 이 중 두번째 단계 즉 유지초본이다.

내용

김은호는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재학 시절(1912~1917) 고종의 사진을 보고 모사한 어진으로 그 재주를 인정받아 궁궐에 들어가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리게 되었다.

김은호가 어진을 그리게 된 경위와 방법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 『서화백년(書畵百年)』(중앙일보 동양방송, 197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순종 어진 초본을 그리고 나서 당시 순종비의 조모상(祖母喪)을 당해 잠시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시작하여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김은호는 이때가 1913년이라고 기억했으나 『순종실록(부록)』에 의하면 순종비의 조모상이 나서 장례식을 치룬 해가 1915년 7월에서 8월 사이이고 김은호가 순종어진을 완성하고 300원을 하사받은 것이 1916년 10월이다. 1916년 7월 25일자 『매일신보』에도 김은호가 순종어진을 완성한 사실이 보도되어 김은호가 공식적으로 순종어진을 제작한 시기는 1916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은호는 당시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의 큰 방에서 폭 4자(약 121.2㎝), 길이 7자(약 212.1㎝)의 대원수군복반신상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1905년 통감부시기에 원수부가 폐지된 이후 황제가 대원수가 아니라 육군대장으로 지위가 격하되었기 때문에 순종의 군복본은 육군대장복본이었을 것이다. 이때 제작한 순종군복본 반신상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유지초본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유지초본은 국립현대미술관본과 고려대학교박물관본 두 점이다. 국립현대미술관본은 오른쪽 하단에 계해(癸亥)년 즉 1923년에 그려졌다고 쓰여 있다. 1923년에 김은호가 순종어진을 그렸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어 이 작품은 비공식적으로 제작된 작품일 것이다. 작품의 크기는 1916년에 그렸다는 작품보다 작으며 용안 부분만 정확하게 그리고 복식은 묵선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순종의 모습은 통감부시기 황실 어용사진사 역할을 했던 이와타 카나에[岩田 鼎, 1870~?]가 1909년경 촬영한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므로 30대의 모습이다.

어깨에 견장, 소매에 인자형(人子形) 수장(袖章)이 있는 것은 대한제국기 대원수예복(大元帥禮服)과 같으나 소매의 인자형 수장이 11줄에서 9줄로 바뀐 것에서 대원수복이 아니라 육군대장복임을 알 수 있다.

순종의 목에는 1907년 훗날 다이쇼(大正) 천황이 되는 일본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 천황을 대신하여 대리 수여했던 대훈위국화장경식(大勳位菊花章經飾)이 걸려있으며 오른쪽 가슴에는 네 개의 훈장이 달려있다. 즉 왼쪽 위의 훈장은 황실을 상징하는 금척(金尺)문양이 들어간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이며 그 아래의 것은 역시 황실용으로 1902년 제정된 서성대훈장(瑞星大勳章)이다.

금척대훈장의 한가운데 원형 부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사진과 거의 유사하다. 이에 반해 오른쪽 위의 훈장은 그 형태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아래의 훈장은 일본으로 부터 받은 국화대훈장(菊花大勳章)이다. 왼쪽의 훈장에 비해 오른쪽 훈장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순종 사진에서 음영이 드리워진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23년에 제작된 것이나 1909년경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작품 속의 순종은 군통수권을 상실한 채 육군대장으로 지위가 하락한 마지막 황제로서의 모습이다.

김은호는 1916년 순종의 용안을 그릴 때 전통적인 초상화법인 배채법(背彩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배채는 자연스러운 발색과 명암을 나타내기 위해 종이 뒤에서 엷게 색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얼굴의 골상과 육리문을 따라 세필로 나타내던 전통적인 초상화법 대신 사진을 보고 그 윤곽과 음영을 파악하여 부드럽게 그리는 사진영상식 수법을 사용하였다. 사진영상식 초상화기법은 1908년 정동 부근 사진미술소를 차리고 사진화법을 가르친 재한일본인 화가 시미즈 토운(淸水東雲, 1868~1929 추정)을 통해 보급되고 있었다.

김은호는 이러한 초상화기법을 받아들여 순종어진 이외에 천도교 교주 「최시형상(崔時亨像)」(1915)을 비롯하여 「민영휘상(閔泳徽像)」(1916~7), 「이준공상(李埈公像)」(1923) 등 세도가들의 초상을 다수 제작하였다.

고려대학교박물관본 「순종 어진」은 국립현대미술관본에 비해 약간 크지만 사진영상식 수법으로 변화된 표현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본과 마찬가지이다. 제작시기가 적혀있지 않아 1913년, 1915~1916년, 1923년 등 여러 추정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본이 이와타의 사진을 그대로 그린 것이라면 고려대본의 용안도 같은 사진을 참조한 것이지만 이와타 사진과 달리 육군대장 대례복이 아니라 상복(常服)을 착용하고 있다. 따라서 화려한 술이 달린 견장이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 부분으로 두르는 식서(飾緖)는 착용치 않았으며 술이 달리지 않은 견장과 훈장 2개를 패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은호는 1926년 순종 타계 이후인 1928년 선원전에 모실 어진을 다시 그렸다. 이때의 어진모사는 이왕직에서 주관했으며 길이 6자(약 181.8㎝), 폭 4자(약 121.2㎝)의 대형으로 용안은 이와타 카나에의 사진을 참조하고 복식은 익선관곤룡포를 입은 정면상으로 제작되었다. 이로써 김은호는 멸망하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어진 화가가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사』(홍선표, 시공사, 2009)
『이당 금은호』(한국근대미술연구소편, 국제문화사, 1978)
『서화백년』(김은호, 중앙일보 동양방송, 1977)
「청년화가의 영예」(『매일신보』, 1916.7.25)
「어진을 그린 화사 김은호에게 돈을 하사하다」(『순종실록(부록)』, 191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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