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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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행정
인물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교육자.
이칭
이칭
오천(嗚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3년 11월 12일
사망 연도
2002년 1월 26일
본관
파평
출생지
전라북도 익산
관련 사건
부산정치파동|2·4파동
목차
정의
단국대학교 학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교육자.
내용

1913년 11월 12일 전라북도 익산군 출생으로 호는 오천(嗚川),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앙고보 재학시절 보성전문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제2회 전조선 남녀전문학생토론대회에서 개회사를 발표했다. 1936년 중앙고보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1939년 졸업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일본 주오대학교[中央大學校] 법학부를 졸업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고려청년당이 결성될 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중앙고 교사로 근무하며 1946년 4월 조직된 서북학생원호회 감사로 활동했다. 인촌(仁村) 김성수의 추천으로 전라북도 문사(文社)국장이 되었고, 1948년 총선거를 위해 그해 3월 전라북도 선거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48년 9월 29일 새교육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전주 명륜대학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직하다가 1950년 3월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익산 을 선거구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0년 9월 국회 탄핵재판소 심판관으로 위촉되었으며, 1953년 1월 국회 상임분과위원장 선거에서 문교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또한 같은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벌어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할 것을 발의하기도 했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익산 을 선거구에서 낙선했다. 1955년 3월 단국대학교 학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공천 받아 익산 을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의정기간 중 교육법 중 「교사국가고시안」과 「국정교과서가격사정 개정안」과 같은 개혁안을 주도적으로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2대 국회와 4대 국회 때는 부산정치파동과 2·4파동을 겪으며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 8월 문교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보성전문학교 스승인 오천석 문교부 장관과 함께 일했다. 1961년 5월 개각으로 제9대 문교부 장관이 되었으나 불과 13일 만에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실각했다.

실각 후 연금되었다가 1962년 1월 해제되었으며, 1964년 『새교육시보』를 창간해 사장이 되었다. 1965년 5월 민중당이 창당되면서 전라북도 이리·익산지구당 조직책, 같은 해 7월 민중당 중앙상무위원을 맡았다.

1965년 8월 국회에서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이 처리되자 윤보선을 비롯한 민중당 강경파 당원이 탈당해 조직한 신한당 창당에 참여했다. 윤보선의 측근으로 1966년 2월 창당운영위원회 위원, 이리·익산 지구당 조직책, 4월 중앙상임위원회 문화공보분과위원장, 5월 당무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1966년 11월에는 신한당 사무총장을 겸직했다.

1967년 2월 신한당과 민중당이 합당하면서 단일야당 신민당 후보로 이리·익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70년 9월 신민당에서 대통령후보지명대회와 후보조정문제를 협의하는 12인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71년 2월 선거에 관한 자문에 응할 신민당 지도위원회 위원 41명에 포함되었고,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이후 신민당에서 탈당해 조직한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73년 1월 민주통일당 창당준비위원회 지역구 조직책, 2월 민주통일당 통일위원장을 맡았으며, 익산·군산·이리·옥구 선거구에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3년 12월 민주통일당 전당대회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74년 11월 사단법인 한국민족문화고증학회가 발족하면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12월 민한당이 창당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81년 4월 민한당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4월 평화통일자문회의의 정당추천 자문위원으로 민한당 추천으로 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3년 4월 민한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94년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교육사업으로 1986년 단국대 설립자인 범정(梵亭)기념사업회 회장, 1989년 범정(梵亭) 장형선생과 은당(恩堂) 조희재 여사를 기리는 범은장학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1983년 이시영의 『감시만어(感時漫語)』를 발굴해 편역했고 성재(省齋) 이시영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9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부의장, 1991년 전국지도자육성협의회 회장, 1992년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2년 임란 400주년 재조명학술대회 회장, 1993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상훈으로는 1993년 제6회 자랑스러운 중앙인상, 1994년 제9회 자랑스런 고대인상 등이 있다. 2002년 1월 26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의정총람』(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
「윤택중 전 문교부 장관 별세」(『매일경제』, 2002.1.28)
「“구체제 청산돼야 역사발전” 60년 7·29선거서 민의원 당선된 윤택중씨」(『동아일보』, 1991.7.26)
「윤택중 전 문교장관 범은장학재단 설립」(『경향신문』, 1990.6.6)
「윤택중 전 문교장관 성재 감시만어 출판기념회」(『경향신문』, 1983.4.14)
「정치위의장에 윤택중씨 통일당 임명」(『동아일보』, 1973.10.22)
「통일당 통일위장에 윤택중씨」(『동아일보』, 1973.2.7)
「이리 윤택중씨 당선무효 소송」(『동아일보』, 1967.6.17)
「윤택중씨 겸직 승인 신한당 사무총장」(『경향신문』, 1966.11.8)
「썩은정치 바로잡자」(『동아일보』, 1958.3.23)
「윤택중씨를 승인 단국대학장에」(『경향신문』, 1956.3.8)
「윤택중씨도 출마」(『경향신문』, 1950.5.22)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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