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11월 18일 경상북도 문경 출생으로, 본관은 진성, 호는 효정(曉汀)이다. 1922년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8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 1928년 5월 서울에 홀로 상경해 잡화점 점원생활을 하다 1931년 9월 일본으로 밀항해 11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특수 일간신문 고용원으로 취업했다.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1933년 4월 4년제 갑종중학교인 일본 오사카북양상업학교[大阪北洋商業學校] 야간 3학년에 편입했다. 1935년 3월 북양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35년 4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 야간부에 입학해 1938년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해 서울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경리·인사관리·상품구매 담당 직원으로 취직했으며, 1940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해 미나카이 백화점 도쿄지사에 취직했다. 1941년 4월 일본 도쿄[東京]의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고, 1942년 7월 2차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다.
1943년 10월 금융조합 이사시험에 합격하고 수습과정을 이수했으며, 1944년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1945년 2월 일본에서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예비사관학교인 교토[京都]의 후꾸지야마[福知山] 교육대에 입교해 훈련 받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귀국해 1945년 10월 대구지방법원 사법관시보로 임명되어 1947년 9월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진급했으며, 1948년 5월 5·10총선거 대구 중구 선거위원장직을 맡았다. 1950년 3월 판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고향인 문경에서 1950년 5·30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2년 5월 민국당에 입당해 1954년 5월 대구 을구에서 민국당 공천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8년 5월 5·2선거에서 대구 을구 민주당 공천 후보 출마해 제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9년 제14차 UN총회 대표로 참석했고, 1960년 3월에는 ‘마산의거’ 국회조사에 참여했다.
4·19 이후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악법 개정작업에 동참했으며, 1960년 7월 7·29 총선에서는 문경에서 무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같은해 8월 민주당 수석부총무로 피선되었고, 1961년 5월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했으나 보름도 되지않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투옥되었다. 5일 후 석방되었으나 8개월간 가택 연금되었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대구 중구에서 낙선했으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천·금릉 지역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0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11월 서울공증인합동사무소에서 활동했다. 1984년 공증인 임기가 만료되어 변호사로 개업해 활동했으며, 2000년 11월 2일 숙환으로 사망했다.저서로는 1987년에 펴낸 회고록 『나의 인생, 나의 회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