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3월 10일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본관은 단양, 호는 겸산(兼山)이다. 1926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일본 마쓰야마고등학교[松山高等學校]를 졸업했다. 1934년 큐슈제국대학교[九州帝國大學校]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東京大學校] 대학원 재학 중 부친상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일제 하에서 평안북도 경찰국 경부와 평안북도 박천 경찰서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1946년 1월 동대문 경찰서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중앙경찰청 경무감 대리, 9월 수도경찰청 부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1947년 8월 경기도 경찰청장, 1948년 9월 경상남도 경찰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에 들어가자, 1949년 일제하 경찰 출신인 윤우경(尹宇景), 김정채(金貞彩), 전봉덕(田鳳德) 등과 함께 헌병대로 자원하였고, 당시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과 헌병사령관인 원용덕(元容德)은 이들을 영관급 장교로 받아들였다. 1949년 제1사단 헌병대장이 되었으며, 1950년 대령으로 헌병부사령관 겸 서울헌병대장으로 진급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 대령으로 예편하고,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으며, 1951년 6월 내무부 치안국장이 되었다. 1952년 3월 서울시 부시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53년 11월부터 1956년 5월까지 제4대 경기도지사로도 활동하였다.
1956년 5월 제13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지방의원 선거에서 야당계 입후보자에 대한 탄압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다. 유옥우(劉沃祐) 의원 등 야당 의원 48명이 국회에 내무부 장관 불신임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1956년 8월 찬성 86표, 반대 88표로 부결되었다.
1956년 11월에는 장면 부통령 피습 사건의 책임을 물어 야당 의원들이 두 번째로 내무부 장관 불신임 안을 상정했으나, 다수당인 자유당에 의해 표결 보류 처리되기도 하였다.
1957년 1월 윤제술(尹濟述) 의원 등 야당 의원 61명이 세 번째로 내무부 장관 불신임 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여론이 악화되자, 사표를 제출해 2월 3일 수리되었다.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경기도 연천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북5도 행정자문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회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혁명 후, 전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배후에 당시 내무부 장관 이익흥, 자유당 총무위원 임흥순(任興淳)이 개입되어있었음을 폭로하였고, 이들은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되어 1961년 3월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5·16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1966년 원효여객 자동차 사장, 서울수산 이사, 1971년 명지대학교 연구교수, 단양 이씨 대종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78년 5월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 평화통일정책자문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어 199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1993년 11월 26일 향년 88세로 사망하였다.
1950년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1년 대한민국 1호로 방위포장을 수여받았다. 1952년 2월에는 공비 소탕 및 치안 확보에 대한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1958년에는 대한민국 1호로 청조소성훈장을 받았다. 또한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동엽 자유훈장과 1953년 은엽 자유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