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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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춘봉(春峰)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 4월 13일
사망 연도
2004년 1월 16일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유평리
관련 사건
미국 전략첩보국(OSS) 침투작전|수원청년단사건|국민보도연맹사건|부산정치파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이후, 내무부 차관, 민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내용

1904년 4월 13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유평리 출생으로, 호는 춘봉(春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919년 횡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해 1923년 졸업했으며, 그해 10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1924년 안정수가 후원하는 뉴욕 감리교회 3·1절 기념식에서 이승만을 처음 대면해 이후 이승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1936년 미국 테네시(Tennessee)주에 있는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밴더빌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41년 12월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보조정국(COI, Coordinator of Information)은 중국을 통한 일본침투라는 특수첩보작전 계획을 수립하면서 1942년 3월 제1기 대원을 모집했고, 이승만의 추천으로 한국인 COI대원 제1호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COI부대 계획은 1942년 6월 공식적으로 중단되었고, 1942년 7월 11일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으로 개편되었다.

OSS소속으로 1942년 7월 인도 뉴델리에 도착해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중경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한국위원부를 연계시킬 계획으로 이승만과 김구 간의 비밀문서 연락업무도 은밀히 수행했다.

1944년 가을 OSS에 우호적이었던 웨드마이어(Albert Wedemeyer)가 중국전구 미군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며 OSS 중국지부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 쿤밍[昆明]의 미국 14공군기지와 충칭[重慶]을 드나들며 직접 김구와 접촉해 통신연락책을 맡았다.

OSS소속으로 활동 중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16일 미군 군속의 신분으로 귀국했다. 초기 정보참모부(G2)에 배속되었으며, 육군본부 의무감(醫務監)을 지낸 윤치왕(尹致旺)의 딸 윤선희(尹善姬)와 결혼했다.

1948년 7월 이승만이 조직한 정보공작기관인 대한관찰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9년 1월 대한관찰부가 사정국(司正局)으로 변경되어 사정국장이 되었다. 1950년 6월 17일 내무부 장관 백성욱(白性郁)의 권유로 제3대 내무부 치안국장에 기용되었고, 부임 1주일 후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즉시 구속과 형무소 경비강화를 내용으로 한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비상통첩을 전국 도 경찰국에 경찰무선전보로 보내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책임자가 되었다.

재직 30일 만인 7월 17일 사임했다.

내무부 치안국장을 사임한 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쟁으로 휴간했던 『국도신문』의 판권을 인수해 국도신문사 사장이 되었으며, 1951년 2월 1일부터 신문을 속간했다. 같은 해인 1951년 12월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952년 1월 내무부 장관 서리로 전임되어 그해 5월까지 제7대 내무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재임 중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는 「발췌개헌안」 통과에 앞장섰다.

장관 퇴임 후 국도신문사 사장으로 계속 활동했으며,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강원도 횡성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58년 5월에는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강원도 횡성 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정치정화법」에 적용되었으나 1963년 2월 해금되었고, 이후 공화당에 가입했으나 공화당 공천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가 임업장을 경영했다. 2004년 1월 16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54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고정휴,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56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정병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돌배개, 200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3 한국광복군Ⅳ 해제 (정병준, 국사편찬위원회, 2005)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학살」(한지희, 『역사비평』37, 1996)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장석윤 전 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35-392, 1986)
「나는 모국의 스파이였다」(『서울신문』, 2005.6.28)
「장석윤 전 내무장관 별세」(『세계일보』, 2004.1.18)
「최초의 한국인 대원 장석윤 옹 “42년 7월 버마전선 투입 이 박사-임정 연락책 활동”」(『경향신문』, 1995.2.2)
「장석윤 전 내부장관 회고록 펴내려 자료정리」(『경향신문』, 1987.3.12)
「치안국장에 장석윤씨」(『동아일보』, 1950.6.21)
국가기록원(www.archives.go.kr)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독립기념관(www.i815.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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