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지영(智英)이라는 이름을 지닌 불화승의 활동은 두 시기에 걸쳐 확인된다. 우선 1653년 구례 화엄사 영산회괘불탱(국보, 1997년 지정)의 조성에서 수화승으로 확인되는 지영이 있다. 그는 탄계(坦戒), 도우(道祐), 사순(思順), 행철(行哲), 나협(懶冾) 등 다섯 명의 화승과 함께 대작의 영산회상도를 그렸다. 이 괘불도는 1622년 나주 죽림사 괘불도를 제외하면 전라권역에서 조성된 괘불도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불화이다. 지영은 한 화면에 두 가지 시점을 적용하여 괘불에 도해된 영취산의 설법회를 재현하였다. 즉 본존 석가모니불과 청법중으로 배치된 보살, 나한, 제자 등은 일반 불화에서처럼 불화를 예경하는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리고 불보살의 앞에 놓인 탁자, 사천왕이 위치한 화면 하단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시점으로 그렸다. 지영이 그린 화엄사 괘불도는 안정된 구도와 섬세한 필선, 차분한 색조로 17세기 불화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화이다.
지영이 그린 다른 불화로 현존하는 작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화엄사사적기(華嚴寺事蹟記)』를 참고하면 괘불도를 조성하기 이전 화엄사 법당을 중수하기 위해 지영과 사인(思印 )비구를 초청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당시에 조성된 불화는 현존하지 않지만 법당에 봉안되는 불화와 단청 불사 등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도 화승 지영이 등장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684년 『명성왕후숭릉산릉도감의궤(明聖王后崇陵山陵都監儀軌)』, 1698년『장릉봉릉도감의궤(莊陵奉陵都監儀軌)』의 조성소(造成所) 화승 기록을 참고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현종(顯宗)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 조성이나 단종 사후 추복(追復)하여 그 원묘(園墓)를 능으로 추봉(追封)한 기록에도 조성소 화원으로 지영이 기입되어 있다. 또한 1695년 수화승 상린(尙璘)이 그린 적천사 괘불탱(보물, 2005년 지정)의 동참 화사 목록과 1699년 수화승 의균(義均)이 그린 대구 동화사 아미타불회도의 화기에도 지영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문인 정시한(丁時翰)에 의해 작성된 『산중일기(山中日記)』를 참조할 수 있다. 정시한이 1686년에서 1688년에 이르는 시기에 지리산을 여행하면서 만난 승려 중 지영, 사순, 행철의 법명을 찾을 수 있다. 사순과 행철은 지영과 함께 화엄사 괘불도를 그린 화승 목록에 등장하는 승려와 법명이 일치한다. 정시한은 1686년 7월 13일 함양 금류동암에서 지영을 만났으며, 지영은 ‘순천(順天) 동리산(桐裡山) 대흥사(大興寺)에서 온 신유생(辛酉生)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유생은 1621년 생으로 화엄사 영산회괘불탱의 수화승 지영과 동일인이라면 괘불을 그릴 당시 32세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86년에는 남원 실상사에서 온 사순비구를 만났으며, 그 2년 후인 1688년 구례 법왕대에서 비전승(碑殿僧) 행철 비구를 만난 기록이 전한다.
이들을 모두 동일인으로 볼 수 있을지, 1653년 화엄사 괘불도를 조성한 지영과 이후의 기록에 등장하는 화승 지영은 활동 시기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보아야 할지는 후속 자료의 발굴을 기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