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에 걸쳐 활동한 불화승이다. 생몰년이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기재된 불사와 남아 있는 작품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불상 조성에 참여했으며 17세기 후반부터는 수화승으로 불화 제작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천신(天信)의 초기 작업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승려 조각승인 인균(印均)이 주도한 불사에서 확인된다. 1655년 여수 흥국사 응진당 목조삼세불좌상과 오백나한상을 조성한 불사와 다음 해인 1656년 선종도총섭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을 비롯하여 명조(明照), 진일(眞一) 등의 도총섭(都摠攝)과 각지의 대덕(大德)이 동참한 송광사의 불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참여한 50여 명의 승장 중 천신은 12번째로 기재되어 있다. 이후 1668년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천신의 이름은 불상을 조성한 후 그 내역을 기록한 발원문이나 조성기에서 찾을 수 있다.
화승으로서 천신의 양식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1688년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1987년 지정), 1693년 여수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보물, 1974년 지정), 1700년 부안 내소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이 전한다. 17세기의 영산회상도는 전하는 작례가 매우 희소한데, 현재 확인된 세 점의 작품 모두 천신이 수화승으로 그린 불화이다. 인도 영취산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 모임을 도해한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대웅전의 후불화로 가장 선호된 도상이다.
천신은 대체로 설법회도의 구성이 화면 중앙으로 집중될 수 있도록 인물의 배치와 구도를 선택하였다. 본존의 뒤편에 배치된 광배를 하단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하고 좌우에 시립한 보살 역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거나 신체를 화면 중앙을 향하도록 배치하여 불화를 올려다보는 예배자가 불보살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하였다. 불상 뒤편에 걸리는 전각용 예배화인지 전각 바깥에 걸리는 대형의 의식용 불화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하단 중앙부로 집중되는 효과는 동일하다.
인물의 표현에서도 얼굴 상부가 다소 넓으면서도 둥근 인상을 주며 특히 측면향을 취한 경우 긴 눈과 작은 입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광배, 법의의 색조는 주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면서 담채에 가까운 밝은 푸른색을 사용하였다. 육신부를 채색한 후 존상의 눈썹과 눈, 귀, 턱 아래 등을 분홍 선염으로 음영을 가해 홍안(紅顔)을 표현하였다.
한편 천신은 불사 기록에서 화승이 아닌 화주(化主) 및 시주(施主)의 역할로 등장하는데 1708년 고흥 능가사(楞伽寺)에서 발간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 ‘서사화주(書寫化主)’로 참여하였다. 당시 능가사의 불사는 조선 후기 불교계의 주된 세력이었던 청허 휴정(淸虛 休淨)의 문파 중 편양문파(鞭羊門派)에 의해 주도되었다. 능가사 불사는 17세기 전반 조각승으로 이름을 날렸던 색난(色難)을 비롯하여 상종(尙宗), 연변(衍卞), 덕현(德玄), 통준(通俊), 취연(翠衍), 탄준(坦俊), 자화(自和) 등의 승려가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천신이 편양문파가 주축이 된 불서 간행에 재정적 기반을 마련한 화주로 활약한 이유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천신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천신이 그린 불화의 문양 표현, 채색법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은 1653년 화엄사 괘불도, 1673년 천은사 괘불도 등 전라권역에서 조성된 괘불도와 유사성이 있다. 천신이 17세기 중반 화엄사 대웅전 중수, 불상 제작에 관여한 인균, 무염(無染) 등의 불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도 공유하는 요소를 추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