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욱 영정 및 초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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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언욱 영정 및 초본
부여 정언욱 영정 및 초본
회화
유물
국가유산
조선시대의 문관 정언욱(鄭彦郁, 1713~1787)을 그린 초상화와 초본(草本).
이칭
이칭
부여 정언욱 영정 및 초본, 정언욱 초상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부여정언욱영정및초본
분류
유물/일반회화/인물화/초상화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유산(2007년 10월 30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정림로 83 (부여읍, 정림사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문관 정언욱(鄭彦郁, 1713~1787)을 그린 초상화와 초본(草本).
내용

200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장관복본은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13㎝, 가로 63㎝. 초본은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31.7㎝, 가로 42.8㎝. 「정언욱 영정」은 전신상에 관복을 입은 모습의 정장관복본(正裝官服本)과 기름 종이에 그린 밑그림의 유지초본(油紙草本)이 전해진다.

정장관복본의 「정언욱 영정」은 머리에는 오사모(烏紗帽: 검은색 모자의 일종)를 쓰고 얼굴은 좌측면이 3/4 가량 보인다. 단령(團領: 관리들이 입던 관복)을 입고, 공수(拱手: 두 손을 맞잡음)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얼굴과 모자는 반측면을 향하지만, 몸체와 의자 등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두 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맞잡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의자에는 표피(豹皮)가 깔려있고, 바닥은 묘사되지 않았다.

유지초본은 화면을 세로로 삼등분하여 접어서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는 탕건을 쓴 얼굴의 유지초본, 좌우의 별지에는 초본의 주인공과 화가에 대한 간단한 내용이 적혀있다. 오른쪽에는 “숙종대왕삼십구년계사윤오월초이일인시생 영종대왕오십일년을미작 화수평양이유덕(肅宗大王三十九年癸巳閏五月初二日寅時生 英宗大王五十一年乙未作 畵手平壤李有德)”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에는 “영종대왕오십일년 청건륭사십년재오주시시년육십삼초본 정유소서일서년육십오(英宗大王五十一年 淸乾隆四十年在吳州時時年六十三草本 丁酉小署日書年六十五)”라고 쓰여 있다. 즉 이 초본은 1775년(영조 51)인 정언욱 63세 때 평양의 화가 이유덕이 그렸고, 정언욱이 1777년 65세 때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지초본은 그림의 화법(畵法)과 화기(畵記)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정언욱이 살았을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장관복본은 흉배와 서대(犀帶: 허리띠의 일종)가 당시의 복식제도에 맞지 않고 각대와 흉배, 호패의 술로 추정되는 장식 등이 당시의 양식과는 맞지 않아 조선 말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문화재청 편, 눌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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