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의 결성 움직임은 1984년 상반기부터 시작되었다. 서울대의 일부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1984년 6월경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 각각 전위적 기간조직을 건설하고 그것을 통일적으로 조직화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자신들의 투쟁노선을 선명하게 제시하여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을 건설하고자, 1984년 가을 기관지 『깃발』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깃발』을 통해 이들은 기존 학생운동을 개량주의, 대중추수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각각의 개별적 부문운동이 아닌 전체 혁명운동의 한 주체로 자리 잡아야 하며, 이를 위해 전체 혁명운동의 전략전술은 민족민주혁명(일명 NDR)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후 1984년 10월경 『깃발』의 노선에 동의하는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모아 ‘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민추위는 조직 결성과 동시에 하부조직 건설에 나서, 서울대에 ‘민주화투쟁위원회’(약칭 민투, 별칭 MT)를 만들었다. ‘민투’는 곧 연세대, 성균관대, 고려대에도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들 4개 대학 ‘민투’가 주축이 되어 1984년 11월 ‘전국민주화투쟁학생연합(약칭 민투학련)’이 결성되었다.
이렇듯 민추위 조직의 기본모형은 학생회(대중조직)-투쟁위원회(선도적 투쟁조직)-민추위(전위적 지도조직)라는 3단계의 틀로 이루어졌고, 이는 각각 합법-반(半)합법-비합법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밖에 민추위는 민투 이외에도 민중운동에 대한 지원투쟁을 담당하는 노동문제투쟁위원회(약칭 노투), 대중에 대한 홍보를 담당하는 홍보위원회, 기관지 『깃발』배급팀 등의 조직을 운영하였다. 특히 민중지원투쟁은 노동자와 빈민들의 투쟁에 적극 참여하였던 민추위가 중점을 두었던 분야였다.
민추위는 1985년 5월 각 대학 학생회 연합체인 ‘전국학생총연합(약칭 전학련)’이 주도하고, 서울대 등 5개 대학 투쟁위원회가 결행한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의 계획 과정에 개입하였다가 수사당국에 그 실체가 포착되었다.
결국 1985년 7월부터 문용식(文龍植), 안병룡(安秉龍), 황인상(黃仁相) 등 민추위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민추위의 배후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의장 김근태(金槿泰) 등이 함께 구속되었다. 이들은 모두 수사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특히 김근태에 대한 고문 사실이 폭로되면서 이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1985년 10월 29일 검찰은 문용식 등 민추위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 그 중 22명을 기소하였으며, 3명을 불구속입건하는 한편, 17명을 수배하였다. 이때 수배자 중에는 민추위 산하 서울대 민투 조직책 박종운(朴鍾雲)이 있었는데, 이후 1년 반이 넘도록 박종운을 추적하던 경찰은 1987년 1월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후배 박종철(朴鍾哲)을 연행해 물고문을 자행하였다. 결국 박종철은 사망했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