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청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청년단체들이 전국 각지에서 결성되었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등 기존 청년단체들 간의 연대활동에 대한 요구도 함께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1988년 11월 25일 전국청년단체대표자회의에서 청년단체들의 연합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여 민청련,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부산민주청년회,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등 4개 단체가 준비소위를 구성하였다. 이후 준비소위에 나라사랑청년회와 인천민주청년회가 새롭게 참가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89년 1월 20일 14개 참가단체와 3개 참관단체가 모여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약칭 전청협)’를 결성하였다. ‘전청협’은 초대의장으로 민청련 의장 이범영(李範永)을 선출하고, 발족선언문을 통해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청년대중의 조직을 더욱 강화할 필요성이 있어 발족하게 되었다”는 결성 취지를 밝혔다.
전청협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조직들을 포괄하기 위해 ‘자주·민주·통일’의 이념적 가치를 내걸고 전청협과 거의 동시에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의 부문조직이 되어 1989년 5월 광주순례,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투쟁 등을 수행하였다.
결성 2년 만에 전국 19개 가입단체에 5천여 명의 회원 규모로 성장한 전청협의 구성원들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민주화운동에만 전념하던 과거활동가들과는 달리, 95% 가량이 노동자, 회사원, 영세상인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전청협 산하 단체들은 걸프전 파병 반대나 지방자치제 선거에서의 반(反)여당운동처럼 정세에 따른 정치투쟁 시 재야의 선봉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외에도, 평소 일상 활동으로 사무직, 출판직, 생산직, 상업 등 직업별 분과모임, 역사연구모임, 탈춤반, 수지침학습반 등 다양한 취미 소모임을 운영하였다.
이후 전청협은 가입단체 간의 행동통일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대표자협의회’로서의 위상을 ‘단체협의회’로 발전시키고자 했고, 1991년 9월 30일 ‘전국청년단체협의회 건설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92년 2월 23일, 42개 진보적 청년단체가 참여한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약칭 한청협)’가 결성됨으로써, 전청협은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