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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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단체
1885년 4월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 초기 개종자들의 전도로 평안북도 의주에 설립된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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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5년 4월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 초기 개종자들의 전도로 평안북도 의주에 설립된 장로교회.
연원 및 변천

의주 상인의 아들인 백홍준은 그의 아버지가 1874년 10월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한 로스(John Ross) 선교사로부터 받아 온 성경을 읽고, 감화를 받게 되었다.그는 1879년 3월 영국에서 선교하던 매킨 타이어(John MacIntyre)를 찾아가 동년 6월까지 그의 성경 번역 일을 돕다가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권서로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이 관아에 알려져 1880년 2~3개월간 투옥되었지만, 석방된 후 매킨 타이어를 다시 찾아가 전도인으로 파송 받았다. 로스의 권서로 활동하던 서상륜도 1882년 10월부터 1883년 1월까지 의주에서 활동했다. 이들의 전도로 의주 지역에는 국내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1885년 4월경부터 자발적으로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의주읍교회이다.이후 1897년 평양선교지부에 베어드(W. M. Baird) 선교사, 선천선교지부에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선교사가 부임해 이 교회를 지도함으로써 교세가 발전하였다. 1905년 조사 김창건(金昌鍵)을 장로로 장립하여 의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당회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교회 부속으로 양실학원(養實學院)을 세워 운영하였으며, 1906년 이 학원에 남녀 중등부·고등부·심상부를 설치 운영하였고, 1907년 장유관(張有寬) 등의 발기로 500원을 모금하고, 의주 지역 유지들의 후원을 얻어 이 학원을 대폭 확장하였다. 당시 교원은 최광옥(崔光玉), 유여대(劉如大), 조학선(趙學璇), 이성하(李成夏), 배신희(裵信希) 등이었다.

1907년 신도수가 증가하여 예배당이 비좁게 되자 교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의주읍 동부에 의주읍동교회를 세웠다. 이때부터 기존의 의주읍교회는 의주읍서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9월 이 교회 출신인 김창건(金昌鍵) 장로가 독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동교회와 함께 담임하였으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9월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3년 3월 2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복귀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는 이 교회 출신 유여대 목사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의주지역 3·1운동을 주도하고, 교인들과 양실학원 교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0년에 발행된 『야소교장로회연감(耶穌敎長老會年鑑)』에는 담임목사 홍하순, 시무장로 강필태(1926년 3월 장립), 강이순(1929년 3월 장립), 윤서명·강인한(1931년 10월 장립), 이지윤(1938년 6월 장립), 김명준(1939년 9월 장립)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윤경로, 한성대학교출판부, 2012)
『대한성서공회사』(이만열·옥성득, 대한성서공회, 1993)
『耶穌敎長老會年鑑』(정인과 편,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40)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차재명 편, 조선기독교창문사, 1928)
집필자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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