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11월 1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가 설립한 숭실학당에 들어가 1906년 5월 중등부를 제3회로 졸업하고, 곧 바로 대학부에 입학하여 1908년 5월 김두화(金斗和)와 함께 제1회 졸업생 2명 중 한 명으로 졸업했다. 이어서 숭실학당 중등부 교사로 활동하고, 1911년 1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2년 1월 평남노회에서 신학교 취학을 허락받았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그의 혐의는 이승훈과 안태국의 지휘 하에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허위 자백을 강요받고 기소되어 1912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항소하여 1913년 3월 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판결을 받고 풀려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10월 장대현교회 조사를 맡았다. 1917년 6월 장로회신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제12회 평남노회에서 장대현교회 부목사로 청빙 받아 7월 10일 담임목사 길선주를 도와 동사목사로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때 길선주 목사가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될 때까지 장대현교회를 담임하였다. 1923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사기편집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교회 안에서 박윤근 등 청년층이 길선주 목사를 배척할 때 청년들 편에 가담했다가 사직하고, 대동군 대동원교회를 담임하였다. 1930년 3월 평양신학교 연구과를 졸업했다. 1935년 철산군 세평교회를 담임하다가 1936년 10월 5일 평양부 오촌리(鰲村理)교회로 전임하여 해방될 때까지 그 교회를 담임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지 않고 북한에서 목회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