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는 1892년 8월 의료선교사 홀(W. J. Hall)을 최초의 평양 주재선교사로 임명하였다. 홀은 그 때부터 조사 김창식(金昌植)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환자들을 진료하며 전도하고, 1893년 3월 평양 서문통 대찰리에 진료소와 전도소로 사용할 집 두 채를 구입하여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893년 4월 초부터 전도소로 사용하던 ‘초당집’에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남산현교회로 발전하였다.
홀은 1894년 2월 평양에서 서울 배재학당 졸업생인 노병선(盧炳善)을 통역으로 동행하여 교육 사업도 시작했는데, 이것이 광성학교로 발전하였다. 1894년 연회에 보고한 평양 지역 교세는 학습인이 8명에 불과했으나, 1895년에는 학습인 14명, 세례 입교인이 6명으로 증가하고, 1896년에는 학습인 30명, 세례 입교인 21명으로 증가하였다. 1896년 봄 교인들의 헌금과 노동으로 남산재(南山峴) 감리교 선교부 부지에 1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와집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때부터 교회 명칭이 행정 구역 이름을 따라 ‘아영동회당’으로도 불렸지만, ‘남산재교회’ 또는 ‘남산현교회’로 불렸다. 그리고 이 부지 안에 별도의 건물을 마련하여 학교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 학교는 남산현소학교로 불리다가 광성소학교, 광성고등보통학교로 발전하였다.
1894년 홀 사망 이후 주재 선교사가 없었으나 1896년 8월 연회에서 복음선교사인 노블(A. Noble) 부부와 의료선교사인 풀웰(E. D. Follwell) 부부를 파송했고, 김창식을 본처 전도사로 임명했다. 그 후 교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898년에는 학습인 473명, 세례 입교인이 52명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학습인 703명, 세례 입교인이 77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1903년 다시 벽돌로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예배당을 지었다.
남산현교회는 1897년 봉룡동교회(후에 선교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서 1899년 칠산교회, 1911년 이문리교회(후에 채관리교회) 등의 지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초 ‘평양 대부흥운동’에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와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남산현교회의 교인수는 3천명을 넘었다.
남산현교회는 1919년 3·1운동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담임목사였던 신홍식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또한 부목사였던 박석훈(朴錫薰)은 3월 1일 8백여 명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고종황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11월 1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남산현교회 여신도였던 전도부인 김세지, 박승일을 비롯한 오신도, 손진실, 박현숙 등도 장로교 여신도들과 함께 1919년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돕다가 1920년 10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44년 4월 감리교단의 ‘애국기 헌납금’을 마련하기 위한 교회 통폐합으로 폐교되었다.
해방 후 교회가 재건되었지만,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월남하는 교인도증가했고1950년 6월 24일 밤 교회 목사가 연행되어 행방불명이 됨으로써 남산현교회의 집회도 중단되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의 평양 탈환으로 남산현교회도 다시 문을 열었지만, 1952년 7월 담당 목사가 월남함으로써 다시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