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충청북도 진천군 이천면 장호원 출생으로, 신학문을 배우고자 1908년 무렵 일본에 유학해 도쿄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 중등과,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졸업했다. 귀국 직후인 1919년 연희전문학교 법률 교수가 되었으며, 4년간 재직했다.
그 후 법률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가던 중 도쿄에서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한인학살을 목격하고 곤경에 빠졌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하와이로 밀항해 이승만(李承晩)을 만났다. 하와이에 머물면서 1924년 6월까지 6개월간 대한인동지회 총무로 기관지인 『태평양잡지(太平洋雜誌)』의 발간을 맡아 관동대지진 참살 진상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노력했다.
1924년 7월 1일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가 멘티카(Manteca) 교회 소속 국어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미국 서남대학(Southwest College)에서 공부했다. 재학 중 1925년 4월 로스엔젤레스 공동회 일원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해산명령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워싱턴 D.C.로 건너가 5년간 이승만의 비서로 보좌했다. 비서로 재임하면서 1928년 아메리칸 대학교(American University)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6월 하와이로 건너가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를 발행하면서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활동했다. 1932년 중반까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으나 일제 탄압이 극심해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7일 우익진영에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대회준비회’에서 상임위원으로 조직부장을 맡았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5년 10월 18일 『조선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회에 가담했고, 같은 달 22일 한국지사영접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어 이승만의 귀국을 맞았다.
이승만 귀국 후 돈암장에서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주로 재정을 맡았다. 1945년 12월 대한국민총회 발기인과 임시정부를 위한 ‘애국금헌성회(愛國金獻誠會)’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으며, 1946년 2월 말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회의를 구성할 때 서무국원으로 인선되었다. 같은 해 4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0월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집행위원, 1947년 9월 상임위원에 선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진천군 한국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6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49년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6월 17일 주한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날인했으며, 7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이 총퇴진해 개선(改選)했을 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민주국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0년 4월 조병옥을 후임 국무총리로 추천하는 연서에 서명했다.
1953년 11월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 1955년 9월 민주국민당 중앙위원, 1958년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1959년 민주당 충청북도 도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60년 4·19혁명 후 8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충청북도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고, 1960년 8월 참의원으로 국회법 심의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정치정화법으로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가 1963년 2월 해금되어 민정당에 입당했다.
1963년 민정당 중앙위원, 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964년 3월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 1965년 3월 민정당 감찰위원, 1966년 신한당 당기위원장, 1968년 대학재단 한양학원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70년 신민당을 탈퇴했으며,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 발표에 참여했다. 1978년 7월 23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