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鎭安郡)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 · 김구영(金龜泳) · 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해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인솔해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으며,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동일한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1921년 상해군정서(上海軍政署) 전북군무총장(全北軍務總長)이 되어 조선독립군 청년단 의용군을 조직하다가 검거되었고, 1년간 복역했다.
해방 후 마령면민대회를 열고 치안위원회를 조직했다. 조선혁명당 지방부장을 맡아 조선건국협찬회(朝鮮建國協贊會)를 조직했다. 이어 1945년 9월 통일전선을 맺기 위한 통일정당결성 준비위원회의 연락부 상임위원을 맡아 대회 개최를 주동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진안군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국회 상임위원회 자격심사위원회 소속으로, 1948년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과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에 위촉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도조사부 위원장을 독립운동가로 선정하도록 제안했다.
1948년 10월 20일 국회에서 미군주둔결의안이 88대3으로 가결되었는데 반대한 3명 중 한명이었으며, 같은 달 22일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국회의원 18명 중 하나였다. 12월 조소앙(趙素昻)을 위시한 사회당 발기인대회에 참여했고, 이듬해인 1949년 1월 사회당의 지방조직 강화 목표에 따라 이문원(李文源), 배헌(裵憲)과 함께 전라북도 지역을 맡았다.
1949년 2월 4일 외국군 즉시철수를 요청하는 남북통일에 관한 긴급결의안의 제출에 동참했으며, 같은 달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에 찬성했다. 3월 부일반역도 등에 의한 모리행위를 숙청하자는 적산대책협회 선언문에 동조했고, 6월 10일 반민족특별위원회 습격사건과 관련해 반민족특별조사위원 사표를 제출했다.
1949년 7월 동성회에서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으로 당적을 바꾸어 대한노농당 소속으로 대한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으며, 1949년 12월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신정회, 대한노농당, 무소속 4파가 합동에 합의해 대한국민당이 결성되었으나 그를 비롯한 대한노농당 17명은 합류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