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2월 2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농업실천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해 1935년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침술전문학원(日本鍼術專門學院)을 2년 수료하고, 목조기항선회사(木造機航船會社)에 입사해 전무로 재직했다.
해방 직후 신탁통치반대투쟁에 참여했다. 조선청년동맹 묵호읍지부 위원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묵호지부 조직부장, 대동청년단 영동지구단부 묵호읍단부 단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 갑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운수체신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48년 9월 한미행정이양협정 반대성명서에 서명했으며, 10월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국회 내 소장파가 모인 성인회(成仁會)에 소속으로 활동하다 1949년 2월 무소속구락부인 동인회(同人會)와 합동해 결성된 동성회(同成會) 소속이 되었다.
1949년 2월 4일 외국군 즉시철수를 요청하는 남북통일에 관한 긴급결의안 제출에 동참했으며, 같은 달 23일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에 찬성했다. 1949년 3월 20일 자율적 남북평화통일 메시지를 유엔한국위원단에 전달한 32명의 소장파 국회의원 중 하나였으며, 3월 26일 부일반역도 등에 의한 모리행위를 숙청하자는 적산(敵産)대책협회 선언문에 동조했다.
1949년 8월 11일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배중혁(裵重赫), 김영기(金英基), 김익노(金益魯), 차경모(車庚模)와 함께 구속되었으나, 10월 구속영장 집행에서 제외되었다. 그 직후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에 가입했고, 같은 해 9월 민주국민당에 당적을 두었다. 1950년 4월 조병옥을 후임 국무총리로 추천하는 연서에 서명했다.
1952년 10월 민국당을 탈퇴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으로 옮겨 조직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동포애중앙위원회 총무부장, 1955년 자유당 조사부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9월부터 사단법인 대한군경원호회 전임 부회장을 맡아 1960년 4·19혁명 때까지 재임했다. 1961년 2월 공민권 제한 명단에 올랐다.
1963년 8월 민주공화당에 입당했으며, 10월 한국유네스코 후원회 상무이사로 선출되었다.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1년 대한노인회 관악구 지부장과 서울시 연합회장을 맡았고, 이후 1990년 대한민국 헌정회 운영위원 및 민족문화통일회 이사, 1991년 신한국도덕국민운동본부 지도위원회 의장, 1992년부터 1996년까지 건국청년운동협의회 본부 부회장, 1993년과 1995~1996년 제헌동지회 회장, 1997년 대한민국 헌정회 편집위원회 의장, 대한민국 건국회 상임고문 및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 2월 9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