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출생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가와바타미술학교[東京川端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수료했다.
1922년 도쿄에서 무정부주의를 표방하고 조직된 비밀결사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했다. 잡지 『현사회(現社會)』 편집인으로 일하며, 소책자 『소작인운동(小作人運動)』, 『자유노동조합(自由勞動組合)』을 비밀리에 출판하고, 『흑우(黑友)』 및 『소작농』 등의 책자를 발행했다.
1923년 4월 도쿄에서 박열(朴烈),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최규종(崔圭淙)과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그 해 10월에 있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즈음해 폭탄을 투척해 일본 정계 요로대관 등을 주살(誅殺)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3년 9월 1일 도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의 동지들과 연계해 김중한(金重漢)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했다.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일본 경시청에 검거되었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도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6년 11월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조직하였고 자유연합주의를 표방했다. ‘피정복자의 해방은 그 자신의 힘으로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어를 내걸고 조국독립과 무정부사회의 실현을 위해 활동했다.
귀국 후에도 흑우회로부터 1929년 1월 『자유청년(自由靑年)』과 같은 간행물을 몰래 받아보았으며, 1929년 6월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 옥성면에서 농촌피폐 구제를 표방하기 위해 협동조합 우리살림사(私生活社)를 조직해 무정부주의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7월 선산협동조합 창립준비회를 조직했으며, 1934년 9월부터 1938년 6월까지 동아일보 선산지국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산군 지회장, 대동청년단 조직원과 독립노농당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선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었고, 6월 국회 산업노농위원회와 징계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농우당(大韓農友黨) 결성 추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국회의원 26명, 한미행정이양협정 반대 성명에 동참했으며, 10월 국회의원 미군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에 참여했다.
1949년 2월 외국군 즉시 철수를 요청하는 남북통일에 관한 긴급결의안 제출에 동참했으며, 같은 달 농지개혁에 관한 임시조치법안에 찬성했다. 1949년 3월에는 자율적 남북평화통일 메시지를 유엔한국위원단에 전달하는 데 서명했고, 같은 달 부일반역도 등에 의한 모리행위를 숙청하자는 적산(敵産)대책협회 선언에 동조했다.
9월 신정회(新政會)로 소속을 바꾸었으며, 12월 일민구락부(一民俱樂部), 신정회,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 무소속 4파의 합동 합의로 인해 대한국민당 소속이 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선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1년 7월 민우회에 가입했다가, 그해 11월 자유당 창당을 위한 신당준비위원회 조사부 간사로 선임되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민우회, 자유당, 무소속, 신라회, 무소속구락부, 원외자유당파로 여섯 번 당적을 바꾸었다.
그 뒤 정치적 재기에 실패하고, 1969년 9월,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대책위원회 공화당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1972년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동참했다.
1983년 7월 5일 사망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