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5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 출생으로, 부친은 이죽면 3·1운동에 참여했던 윤학희(尹學熙)이다. 서울 YMCA학원을 마치고, 피어선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치과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치과 의원을 개업했다.
해방 후 청년 36명을 규합해 영등포청년회를 조직했으며, 좌익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 초대 위원장으로 추대했으나 연설 중 계급투쟁의 부당성을 강조해 좌익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영등포청년회는 영등포 일대 27개 동(洞) 지부를 조직하고 광복군 출신 장교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회원이 1천명으로 증강된 후에는 광복청년회 영등포 특별지회로 재발족했으며, 단장이 되었다.
1946년 가을 철도파업을 분쇄했고, 1947년 3월 1일 당시 영등포 일대의 좌익청년과 노동자들을 상대로 유혈투쟁을 벌인, 일명 ‘신길동 피바다 사건’에 관여했다.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과도 두 차례 세력다툼이 있었다. 민족영등포청년회 세력을 기반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등포 부위원장, 대동청년단 영등포구 단장 겸 본부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영등포구 동회 연합회 사장, 서울시 적십자사 이사, 영등포 노총체육회, 기자협회에서 고문을 맡았다.
1948년 5월 10일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영등포구 대동청년단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6월 국회 상임위원회 외무국방위원회에 소속되었다. 7월에는 무소속구락부 대표로 국무총리 등 주요 요직에 현 과도정부 인물과 한국민주당 측 인물 기용에 항의하는 건의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1948년 8월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으로 위촉되어 반민족행위자 처단을 유보하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반대했다.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발단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며 지지하는 등 이범석(李範奭)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워 족청계로 분류되었다. 1949년 4월 대한청년단 영등포구 단장으로 임명되었고, 9월 민주국민당 소속이 되었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자유당파견중앙위원으로 부산정치파동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유당 창당에 적극 참여했다. 1952년 5월 내각책임제 개헌반대 전국정당사회단체 공동투쟁위원회 서울특별시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6월 국회를 해산시키자며 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1952년 사사오입 개헌이 성공하자 7월 원외자유당 임시전당대회에서 임시집행의장단으로 선출되었고, 9월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의장단 3명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953년 1월 대한청년단 내 족청계의 지지로 원외자유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2월에는 자유당 강화문제를 두고 여운홍(呂運弘) 의원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벌였으며, 대한청년단 내부의 족청계와 비족청계 갈등이 심각해지자 그해 5월 자유당파견중앙위원을 해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영등포 갑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6년 3월 이범석 등이 주동이 되어 공화당을 정식 발족하는 데 임시집행부로 선임되었으며, 1957년 1월 원내교섭단체 정우회(政友會)가 발족하는 데 참여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자유당으로 복당했으며, 1959년 자유당 서울시대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6월 민우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9월 민우당을 위시한 3당이 통합한 국민의 당 조직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치과의사로 활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 발표에 제헌동지회 회원으로 동참했다. 이후 대한노인회 중앙회부회장, 한국청년운동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87년 이후 제헌동지회 부회장, 국회의원 동우회수석부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 중앙회 고문, 제3대 국회의원 친목부회장, 1990년 건국청년운동협의회 회장, 1991년 제헌동지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96년 6월 2일 사망했다.